엄마는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동네 산부인과에서 피검사를 하고 MRI 사진을 찍었다
작은 혹이 자궁에서 발견되었지만
의사는 암은 아닐 거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엄마는 눈이 쉽게 뻘게졌고
낯빛이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그런 날에는 링거를 맞고 되살아났다
벚꽃이 피었다가 지고
번개가 밤하늘을 찢어 놓던 장마가 지나갔다
새로 이사 간 집 천장에 곰팡이가 새어 나오듯
석 달 만에 작은 혹이 주먹보다 더 커졌다
착한 암이라고 했는데 악성 종양이었다
엄마는 일주일 동안 구토 증상을 겪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엄마의 피가 흐르는 내 심장을 만지며 생각한다
엄마는 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환자이고
나는 엄마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중환자라는 걸 알았다
- 이병일 시인 <엄마는 환자, 나는 중환자>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이 시를 보니, 엄마를 떠나보낸 그해 여름이 떠올랐다.
2016년 여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작은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상시 같으면 카톡을 했을 텐데, 바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 불길했다.
"막내야, 엄마가 췌장암 말기래. 어쩌면 좋니.."
얼마 전 화장실에서 넘어져서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 다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의원에 침 맞으러 다니신다길래 그러지 말고 병원을 가보라고 말씀드렸는데, 내 병은 내가 잘 안다며 한사코 버티시길래 엄마네 근처에 사는 작은누나에게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꼭 가보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암이라니.. 췌장암.. 그것도 말기.
형이 대학병원 몇 군데를 급하게 예약했다. 제발 그 진단이 오진이었기를 바랬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병원 두 군데서 모두 같은 진단을 내렸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집으로 모시고 가란다.
그럴 수는 없기에 형은 강남에 비싸다는 한방병원으로 엄마를 모셨다. 서양의학으로 안되면, 한방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며..
2주간의 휴가를 얻어서 서울로 왔다.
그동안 형과 누나들이 수고했으니, 2주간 내가 엄마 수발을 들겠노라고 했다.
엄마는 병원 옥상정원에서 산책하는 시간을 좋아하셨다. 그곳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수국이 만발해 있었다.
엄마는 지난해 서울을 떠나며 뵀을 때보다 야위었고 늙으셨지만, 꽃내음을 맡으며 환하게 웃으시는 엄마는 다시 소녀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식사 수발을 하고 산책을 같이 하고 말벗이 되어드렸지만, 엄마는 대소변과 씻는 것, 그리고 옷 갈아입는 것은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해지셨을 때는 누나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셨다. 엄마는 막내인 내 앞에서도 아직 여자로서의 품위는 지키고 싶으셨나 보다.
하지만, 아직 한창 일해야 하는 아들이 오랫동안 회사를 떠나 있는 것이 걸리셨는지, 엄마는 열흘이 넘어갈 때부터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이에 병세는 하루하루 나빠졌고 그럴수록 나는 엄마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엄마, 컴퓨터 가져와서 여기서 일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아이들이 방학을 해서 아내와 아이들이 할머니를 뵈러 서울로 왔다. 엄마는 나에게 너무 오래 회사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며,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아니, 거의 성화를 부리셨다. 빨리 가라고.. 더 이상 보기 싫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가 계속 화를 내시다가 상태가 더 나빠질까 겁나서 가족들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서 오는 내내 잠을 자지 못해서였는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고 온 가족이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얼마나 잤으려나.. 깨어나 핸드폰을 보니 형과 누나들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왔었다. 형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막내야..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한방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셨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그날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고,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모르핀을 주사해서 마지막 가시는 얼굴은 평온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본인의 마지막을 직감하면서부터 막내를 여러 번 찾으셨다고 한다. 막내가 곧 올 거라는 말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눈을 힘주어 뜨셨다고 한다.
목소리만이라도 들려드리려고 형과 누나들이 나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나는 깊은 잠에 빠져 핸드폰 진동음도 거실에 있는 집전화 벨소리도 듣지 못했다.
엄마를 갑작스럽게 보내고 후회되는 것들이 많았다.
평소 살갑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됐다.
엄마가 아프시기 몇 달 전에 서울에 짧은 출장을 왔을 때 부모님 댁에 잠시 들러 밥 한 끼를 먹었는데, 엄마는 고기를 구워주셨다. 그때 내가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기만 먹는 나라에서 왔는데 고기를 구웠어요? 엄마가 만든 양념게장이 먹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 한마디가 계속 걸리셨는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누나에게 막내가 좋아하는 양념게장을 해줘야 하는데 병원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몇 번을 집에 가야 한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의 병이 췌장암이라는 것과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사실대로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본인에게도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을 드렸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엄마와 나의 마지막도 달랐을 것이다.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들려드리지 못한 것이 아직도 깊은 회한으로 남아 있다.
그래도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엄마 곁에서 오롯이 2주를 보냈던 기억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때, 엄마는 나한테 의지하는 환자였지만, 나는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는 중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