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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건어물 센터'부터 심마니까지 - 검색의 시대

URL을 몰라도 검색해서 바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인터넷의 시작

by 꿈동아빠 구재학

예전에는 대화를 하다가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옥신각신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요즘은 그런 말다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처음 보급되던 시절에는 사뭇 달랐다. 믿기지 않겠지만,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정확한 웹사이트 주소를 알아야만 했고, 웹사이트 주소를 찾는 것은 이용자의 몫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검색의 등장과 당황스러운 결과들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는 ‘검색’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다. 웹사이트의 주소(URL)를 정확히 입력해야만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포털이 아닌 브라우저 주소창에 'www.brunch.co.kr' 같은 정확한 철자를 입력해야지 철자 하나만 틀려도 엉뚱한 사이트로 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직관적이고 쉬운 URL을 선점하고 비싸게 파는 업자들이 판을 쳤다.


이런 불편함 때문에 검색 엔진이 등장했지만, 초기 검색 엔진은 단어의 정확한 일치에만 의존했고, 검색 알고리즘도 매우 단순했다. 그 결과

‘장동건’을 검색하면 ‘마장동 건어물센터'가 나오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결과가 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검색 기술이 아직 초보적이던 시기의 단면이었다.


국산 검색엔진의 태동과 도전

한국 최초의 웹 검색 서비스는 1996년, 대구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성훈이 만든 ‘까치네’였다. 디렉토리 기반 구조에 키워드 검색 기능을 더한 형태로, 사용자들이 키워드만 입력하면 관련 사이트 목록을 찾아주는 방식이었다.


같은 해, 한글과컴퓨터가 자연어 검색 기술을 활용해 만든 '심마니'는 국산 검색 기술의 자존심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사용자는 평문 형태의 문장을 입력해도 검색이 가능했고, 한글 친화적인 설계로 이용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때 국내 점유율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외산 포털의 공세에 밀려 점차 점유율이 하락했다.


당시 한국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외산 포털은 야후(Yahoo!), 라이코스(Lycos), 알타비스타(Altavista) 등이었다. 이들은 검색뿐만 아니라 뉴스, 날씨, 메일, 주식 정보 등 다양한 생활 정보를 한 화면에 모아 제공하는 종합 포털 형태를 갖추며 사용자 경험을 선도했다. 특히 야후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도 ‘야후 코리아’를 통해 직접 진출했고, 국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발휘했다. 라이코스 역시 한글화 된 인터페이스를 바탕으로 뉴스와 커뮤니티 기능을 제공하며 높은 충성도를 이끌어냈다. 알타비스타는 빠른 속도와 방대한 색인량으로 기술적 우위를 자랑하며 초기 마니아층을 확보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국산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한글 지원이 안되더라도 외산 서비스를 쓰는 이용자가 많았다.


이러한 외산 포털의 성공은 단순한 검색 기능을 넘어선 사용자 중심의 통합 서비스 제공, 빠른 시장 진입, 익숙하고 직관적인 화면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글로벌 브랜드 파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산 검색 엔진들은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였고, 검색 외에는 별다른 서비스가 없어 점차 사용자들에게 밀리게 되었다.


이 시기, 한글과컴퓨터의 '심마니' 외에도 1999년에 등장한 '엠파스'는 검색 정확도와 속도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한때 점유율 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자연어 검색 기술을 통해 사용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질문하듯 검색하라’는 콘셉트가 주목을 받았다.


국산 검색의 반격 – 다음과 네이버의 포털 전략

검색엔진 시장에서 밀리던 국산 기술이 다시 힘을 얻게 된 계기는 ‘포털 전략’이었다. 단순한 검색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커뮤니티, 뉴스, 이메일, 카페 등을 하나의 플랫폼 안에 통합해 ‘사용자가 오래 머무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1997년 국내 최초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넷으로 시작한 '다음'은 국내 이메일 시장을 선점했고, 출시 1년 만에 100만 가입자를 확보했다. 이후 사명을 '다음커뮤니케이션'으로 바꾸며 뉴스, 카페 등 다양한 콘텐츠 서비스를 추가해 빠르게 포털로 진화했다.

'Naver'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검색창 옆에 'Provided by Naver'라는 문구가 흥미롭다.


삼성SDS 사내벤처에서 독립하여 검색 엔진을 선보인 네이버는 구글보다 빠르다는 자체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눌려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2002년에 선보인 사용자 참여형 Q&A 플랫폼 ‘지식iN’의 빅히트가 전환점을 만들었다. 검색 결과에 사용자들의 현실적인 답변과 체험담이 더해지며, 단순 정보 제공을 넘어 사용자 간 지식 공유의 장이 되었다.

촌스러웠던 네이버의 초기 로고

이 무렵, 국산 포털 서비스들은 점차 외산 포털을 제치고 검색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야후 코리아, 라이코스 등 한때 국내 1위를 다투던 외산 포털들은 하락세를 피하지 못했고, 마침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외산 포털이 독과점하던 검색 시장을 토종 기업들이 되찾은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것이다. 한국은 그야말로 ‘국산 포털의 반격’이 성공한 많지 않은 사례로 기록된다.


이후 파란, 한미르, 드림위즈, 네띠앙 등 다양한 후발 주자들도 시장에 도전했지만, 이미 다음과 네이버가 주도한 국내 검색 포털 시장의 흐름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특히 네이버는 2000년대 중반부터 검색 광고와 쇼핑, 뉴스, 블로그 등을 통합하면서 사실상 ‘검색이 전부인 포털’을 넘어서 종합 인터넷 미디어로 성장했다.


검색시장의 최강자 구글 역시 2000년대 초반 국내에 진출했지만, 단순한 검색창 중심의 인터페이스가 콘텐츠 중심의 포털에 익숙한 한국 사용자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와서 당시에는 주류로 자리 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Google의 1997년 첫 번째 검색 페이지


검색, 우리의 습관을 바꾸다

검색이 등장하기 전,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뒤지고, 사람을 찾아가고, 전화번호부를 펼쳐야 했다. 하지만 검색창 하나로 원하는 정보가 단숨에 눈앞에 펼쳐지면서 우리의 사고방식, 학습 방식, 심지어 대화의 패턴까지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군가가 생소한 것에 대해 말하면, 바로 스마트폰을 열고 검색을 해서 확인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은 더 이상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고, 검색을 통해 누구나 전문가처럼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싸이월드와 하두리로 대표되는 디지털 자아의 탄생을 따라가 보려 한다. ‘프로필 사진’과 ‘미니홈피’에 나를 담기 시작한 그 시절 이야기를 기대하시라.




<엽기적인 그녀 OST, I Believe - 신승훈>

90년대말 PC통신 나우누리에 '견우74'라는 필명으로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당시에 작가가 겪은 실화라고 소문이 나면서, 매주마다 소설이 나올 무렵이면 검색어 상위 키워드를 차지했었다.


<참고 사이트>

- 나무위키 : 까치네, 심마니, 다음, 네이버

- 검색엔진의 역사

- 검색엔진의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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