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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 시티폰, 문자메시지로 시작된 소통의 혁명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던 시대

by 꿈동아빠 구재학

가끔 '휴대폰 없던 시절에 어떻게 살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해지고,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동통신이 우리 삶에 깊이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삐삐, 혁신의 시작

1990년대 중반 무렵, 이동 중에도 연락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 이상의 혁명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삐삐'라고 불리던 무선호출기였다. 집 밖에서 누군가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는다’는 경험은 이전 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삐삐는 1982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국내 최초로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그 시초다. 초기에는 주로 병원, 언론사, 공공기관 등 특정 직업군에서만 쓰였지만, 1990년대 초반 개인 가입이 허용되면서 급속도로 대중화되었다. 1997년 기준으로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넘을 정도로 국민 기기가 되었다.


처음에 나온 삐삐는 숫자 호출만 가능했다. 그 호출은 누군가에게는 불호령을 예고하는 호출이었고, 연인들에게는 사랑의 호출이었다. 8282(술 마시는 남편에게 빨리 들어오라는 호출), 1004(연인 사이의 천사 호출), 0404(영원히 사랑해)와 같이 숫자만으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음성 메시지를 남길 수도 있었다. 호출자가 사서함 번호로 전화를 걸어 녹음한 음성을, 수신자는 전화로 비밀번호를 입력해 확인했다.

“1개의 음성 메시지가 있습니다. 들으시려면 1번을…”

으로 시작되는 안내음 후에 들려오는 상대의 목소리는 당시 기준으로는 가슴 벅찬 기술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음성 메시지를 반복해서 듣다가, 공중전화박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이후 문자 삐삐가 등장하면서 단문 메시지도 가능해졌지만, 자판이 없는 기기에서 문자를 보내는 방법은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담원에게 말로 메시지를 불러주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망하고 웃픈 상황도 자주 벌어졌다. 연인에게 보내는 애틋한 문장을 낯선 상담원에게 또박또박 말로 불러주어야 했고, 상담원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려다 숙련된 상담원의 노련한 대응에 오히려 당황하기도 했다. 상담원이

"야, 이 나쁜 놈아, 돈 갚으라고! 말씀이십니까?"

라고 태연하게 응대하면 상담원에게 장난치려던 사람이 오히려 당황하게 마련이었다.


삐삐는 단순한 통신기기를 넘어, 사람들의 몸에 늘 붙어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벨트에 삐삐를 차고 셔츠를 살짝 걷어 올리는 모습이 유행처럼 번지며 패션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보급형 삐삐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모토로라 삐삐


시티폰, 공중전화로부터의 작은 해방

삐삐는 분명 새로운 시대를 연 기술이었지만, 공중전화가 없는 곳에서 메시지를 받으면 그 즉시 반응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줄여준 것이 바로 시티폰(CT폰, Cordless Telephone)이었다. 시티폰은 공중전화 기지국 가까이에서만 통화가 가능했고 수신은 되지 않는, 오로지 발신 전용의 휴대전화였다. 초기에는

“휴대전화라더니 받는 건 안 되고 거는 것만 되냐”

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삐삐를 받고 공중전화 앞에서 줄을 설 필요 없이 바로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시티폰은 작지만 실질적인 해방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공중전화 앞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히 시티폰을 꺼내 드는 순간, 마치 미래를 손에 쥔 듯한 기분이었다.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시티폰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은근히 과시하는 문화도 있었다. 이는 단순한 통신 기기를 넘어 최첨단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했다.


기술적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시티폰은 수신 기능이 없어 발신만 가능했고, 따라서 삐삐와 함께 사용해야만 온전한 통신 수단이 되었다. 또한, 기지국이 설치된 지역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중전화 앞에서 긴 줄을 서며 전화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PCS 서비스의 등장으로 발신과 수신이 모두 가능하고 이동 중에도 통화가 가능한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시티폰의 한계는 더욱 부각되었고, 결국 2000년 1월 서비스를 종료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시티폰 기지국이 설치된 공중전화 부근에서 발신만 가능했던 시티폰 (출처 : 경향신문)


문자 메시지의 탄생, 조용한 혁명

이동통신 기술이 본격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하면서, 이동하면서 양방향 통화가 가능한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초기의 휴대전화는 다소 무겁고 비쌌으며, 음성 통화가 주 기능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기기에서 ‘문자 메시지’ 기능이 생기면서 또 다른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문자(SMS)는 짧고 간결한 메시지 전달을 가능하게 했고, 비용도 저렴했다.

초기에는 90년대 후반 등장한 휴대전화의 숫자 키패드를 이용해 문자를 입력해야 했으며, T9 방식처럼 예측 입력 기능이 있는 모델이 나오기 전까지는 각 숫자 키를 반복해서 눌러 원하는 글자를 입력해야 했다. 문자 한 통에는 80~90byte 정도의 제한이 있었고, 문자 요금도 발신 건당 별도로 과금되었지만 통화에 비해 저렴하다는 장점으로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연인들은 통화 대신 문자로 애틋한 마음을 주고받았고, 친구들은 유행어와 이모티콘으로 가득 찬 메시지로 웃음을 주고받았다. 011, 016, 017, 018, 019 등 각 통신사 번호는 소속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문자 하나에 설레던 시절, “배터리 없어서 이따 다시 문자 할게”라는 말도 일상의 언어가 되었다.


이동 통신과 함께 바뀐 사람들의 삶

삐삐와 휴대전화는 사람들의 약속 문화를 바꿔놓았다. “늦을 것 같아”라는 말 한마디가 가능해지면서, ‘기다림에 대한 인내'의 기준도 달라졌다. 올 때까지 약속 장소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도착 전에 미리 연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된 것이다.


연애 문화도 달라졌다. 삐삐에 남긴 음성과, 시티폰으로 걸어온 짧은 통화, 문자 한 통이 관계의 밀도를 만들어갔다. 감정은 더 빠르게 공유되었고, 동시에 더 쉽게 오해되기도 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경계의 시간

삐삐, 공중전화, 시티폰, 초기 휴대전화.

이들은 모두 공존의 시간을 보냈다. 어느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세대 기술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기기를 손에 쥐면서도 익숙한 것을 쉽게 놓지 못했다.

아날로그의 온기와 디지털의 편리함이 겹쳐 있던 그 경계의 시간. 우리는 서툴렀지만 열정적으로, 새로움에 대한 설렘을 안고 기술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인터넷 등장 초기, 엉뚱한 결과를 보여주던 초창기 검색엔진부터 포털 사이트의 등장을 따라가 본다.


<삐삐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1995년에 데뷔한 삐삐밴드 -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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