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선으로 연결된 온라인 세상, 키보드 너머 미지의 사람들과의 교감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면 전 세계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세상이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텍스트 몇 줄을 주고받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리고, '삐익삑삑' 하는 모뎀 연결음을 들으며 가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에서 데이터 통신의 첫걸음은 1982년, 서울대학교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현 ETRI) 간에 구축된 네트워크 시스템에서 시작되었다. 전길남 박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연결은 한국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사례로 기록된다.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일반인을 위한 상용 데이터 통신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985년 데이콤(현 LG U+)이 선보인 ‘천리안’, 1986년 한국통신(현 KT)의 ‘하이텔’이 대표적이다. 초기에는 기업과 기관이 주요 이용자였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며 개인 사용자로까지 이용층이 확대되었고, PC통신은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4년에는 ‘나우누리’(운영: 나우콤, 현 아프리카TV), 1996년에는 ‘유니텔’(운영: 삼성SDS)이 가세하면서 PC통신 시장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 PC통신은 단순한 정보 전달 도구에서 벗어나, 사용자 간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게시판, 전자우편, 채팅, 동호회 등은 지금의 포털 카페와 커뮤니티 문화의 토대가 되었고, 온라인상에서의 사회적 연결을 처음 경험한 세대에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90년대 초중반, 인터넷은 아직 일반인에게 낯선 단어였다.
그 시절,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통로는 ‘전화선’이었다. 그 하나의 전화선으로 온 가족이 통화를 하고, 팩스를 보내고, 컴퓨터로 세상과 연결되었다.
PC통신은 바로 이 전화선을 이용한 통신 방식이었다. 전화선은 원래 사람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아날로그 신호만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의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로 변환하여 보내고, 받는 쪽에서는 다시 디지털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가 바로 모뎀(Modem)이었다.
모뎀은 Modulator(변조기) + Demodulator(복조기)의 합성어로, 컴퓨터가 보내는 0과 1의 디지털 신호를 전화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아날로그 신호로 바꾸고, 반대로 받는 신호를 다시 디지털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은 오늘날의 광통신이나 무선통신에 비하면 매우 느렸다. 9600 bps나 14400 bps 정도의 속도는 초당 1.2~1.8KB 수준으로, 요즘 1 Gbps 속도에 비하면 0.001%에도 못 미친다.
모뎀을 통해 연결되는 대표적인 PC통신 서비스는 다음과 같았다.
하이텔 (한국통신, 현 KT): 가장 대중적이고 다양한 이용자층 분포. 특히 학생과 직장인이 많았다.
천리안 (데이콤, 현 LG U+): 공공기관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주 사용자였고, 비교적 정제된 정보가 많았다.
나우누리 (나우콤, 현 아프리카TV): 자유롭고 감성적인 분위기의 커뮤니티 중심. 동호회 문화가 가장 활발했다.
유니텔 (삼성SDS):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앞세운 세련된 서비스. 젊은 층이 선호했다.
이들 서비스는 지금의 포털, 블로그, 커뮤니티, 이메일, 메신저 기능을 한데 묶은 종합 온라인 플랫폼의 원형이었다.
PC통신은 기술적 한계도 있었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환경의 제약이 더 컸다.
가장 큰 제약은 바로 전화선을 사용해야 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전화선이 하나뿐이었고, PC통신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외부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면 ‘뚜뚜뚜…’ 하는 통화중 신호음이 울렸다. 그래서 한 사람이 통신을 시작하면 다른 가족은 전화 사용이 불가능해졌고, 이 때문에 가족 간의 다툼이나 불편함이 빈번했다.
요금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정액 요금제가 없었던 시절, 전화요금은 이용시간에 따라 과금되었기 때문에 PC통신에 오래 접속할수록 요금이 빠르게 늘어났다. 그나마 밤 11시 이후부터는 심야 요금 할인이 적용되어 부담을 줄일 수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이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집전화는 가족 모두가 함께 쓰는 '공용 전화'이기 때문에 하나뿐인 공용전화가 계속 통화 중인 상태는 가족 구성원들의 외부와의 소통을 제약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주무시는 늦은 밤에야 눈치를 보지 않고 접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현실적 이유들이 겹쳐, 자연스럽게 PC통신은 '밤에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모니터 불빛만이 방 안을 밝히던 그 시간, 우리는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연결된 낯선 세계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PC통신의 세계에서는 닉네임이 곧 자아였다. ‘고독한늑대’, ‘별빛소녀’, ‘블루드래곤’ 같은 이름들이 채팅방과 게시판을 수놓았다. 현실에서는 이름이나 직업, 학교, 나이 등으로 관계와 서열이 정해졌지만, 여기에서는 오직 대화만으로 상대를 만나고 평가받았다.
채팅은 “ASL?”이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Age/Sex/Location(나이/성별/지역)의 약자로, 요즘과 달리 닉네임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기본적인 소개를 위해 꼭 물어봐야 했던 인사말이었다. 그러면 “안냐세요, 방가. 전 053-78-01 블루드래곤입니다”와 같이 자기소개를 했는데, 이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저는 대구에 사는 78년생 남자 블루드래곤입니다."라는 뜻이었다. 전화 지역번호-출생 연도-성별코드를 조합한 ASL 코드와 함께 닉네임을 소개하는 이 방식은, 마치 간첩 암호문 같기도 했던, 그 시절 사이버 세상의 유쾌한 풍속이었다.
PC통신은 오직 텍스트로만 소통해야 했기 때문에, ^^, ㅠㅠ, ㅎㅎ, ㅋㅋ 같은 기호들을 활용해 나름대로 창의적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 --, @_@ 등의 표현도 흔하게 쓰였다.
또한 PC통신은 신조어의 산실이었다. IMF 시대의 절약정신을 반영하는 줄임말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통친(통신 친구), 즐팅(즐거운 채팅), 당스(당연한 이야기), 당근(당연하지), 초딩(초등학생), 중딩(중학생), 고딩(고등학생) 등은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그들만의 언어로 자리 잡았다.
이 익명성과 개성 넘치는 언어는 1990년대 한국의 디지털 감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익명이 보장된다는 점은 사용자들에게 자유로움과 동시에 솔직함을 허락했다. 현실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고민, 민감한 정치나 사회 이슈, 연애상담 등도 익명 채팅이나 게시판을 통해 털어놓을 수 있었다. 당시 ‘고민상담방’이나 ‘하이텔 연애상담동호회’ 등에는 매일같이 진지한 이야기들이 올라왔고, 때론 그것이 실질적인 도움과 위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 익명성 덕분에, 현실의 신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동등한 관계를 맺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학생이 교사에게, 사회 초년생이 회사 임원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능했다.
지금 보면 제한적인 기술처럼 느껴지지만, 그 시절 PC통신으로 우리는 꽤 많은 일을 했다.
자료실에서는 압축파일 형태로 프로그램이나 문서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고
전자우편은 비록 같은 PC통신 사용자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활발히 사용되었으며
온라인 쇼핑도 존재했다. 이미지 없이 텍스트만으로 상품을 설명했으며, 사용자는 계좌이체 후 물건을 기다려야 했다.
동호회 게시판에서는 연애, 과학, 영화, 컴퓨터 등 다양한 주제를 토론했고
MUD 게임이라는,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멀티플레이어 롤플레잉 게임도 즐길 수 있었다. (예: "검을 집어든다", "북쪽으로 이동한다", "괴물을 공격한다")
오늘날로 치면 블로그, 이메일, 커뮤니티, 게임, 전자상거래가 모두 PC통신 안에 담겨 있었던 셈이다.
PC통신이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사용자들의 이해 부족으로 인해 다양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는 모뎀을 이용하면 전화선이 점유돼 집 전화가 통화 중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접속하는 경우였다. 이 때문에 가족 간의 갈등이 벌어지거나 중요한 전화를 놓치는 일도 많았다.
서비스 제공사들도 적잖은 고충을 겪었다. 당시 한 통신사에는 “모뎀을 연결했더니 전화기에서 귀신 나오는 소리가 난다”며 경찰에 신고한 사례가 있었고, 컴퓨터 화면에 아무것도 안 나온다며 항의했지만 실상은 본체 전원이 꺼져 있었던 사례도 있었다.
고객센터 직원들은 '삐익삑' 하는 모뎀 접속음을 설명하거나, 접속 절차를 한 문장씩 읽어주며 도와주는 일이 일상이었다. 어떤 고객은 집 전화가 고장 났다며 AS를 신청했지만, 알고 보니 자녀가 밤새 몰래 PC통신을 쓰고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PC통신은 단순한 기술의 도입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전반의 생활 습관과 소통 문화를 바꿔놓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PC통신은 단지 기술이 아닌, 시대의 감성이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교감은 깊었고, 전화선 하나로 세상과 연결되어 키보드 너머 익명의 누군가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경험은 지금까지도 사라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 초고속 인터넷 보급과 함께 웹 기반 서비스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PC통신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의 등장, 메신저 서비스의 확산, 그리고 무엇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같은 웹 브라우저 기반의 인터넷 환경이 대중화되며, 텍스트 기반의 PC통신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2004년, 유니텔이 가장 먼저 서비스를 종료했고, 이후 나우누리, 하이텔, 천리안도 차례로 문을 닫았다. 마지막까지 명맥을 이어가던 천리안도 2014년,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PC통신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모뎀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채팅창에서 “ASL?”을 묻는 이도 없어졌다. 하지만 키보드 너머에서 나눈 진심 어린 대화와, 밤을 지새우며 동호회 게시판에 글을 올리던 그 시간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PC통신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 우리가 나눴던 감성과 연결의 경험은 여전히 디지털 문화의 뿌리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인터넷이 오기 전의 세상에서도, 느리지만 따뜻한 연결로 이루어진 온라인 감성의 세상을 이미 살아가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삐삐와 씨티폰, 문자메시지로 시작된 이동통신의 변화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간 흐름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PC통신 시절 청춘들의 이야기 : 스물다섯 스물하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