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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랖겪처 Dec 22. 2021

완벽한 나날에 작별의 키스를

아케인, 2021. 그리고 카우보이 비밥. 넷플릭스의 11월을 돌아보며

넷플릭스의 <카우보이 비밥> 실사 드라마 차기 시즌이 캔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날, <아케인>을 완주했다. 모두가 넷플릭스의 11월을 기다렸을 것이다. <카우보이 비밥>과 <아케인>이라는 '대작' 오리지널 두 개의 상륙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베일이 벗겨지자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1막 공개 시부터 무수한 호평을 들으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던 <아케인>은 3막이 공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화려하게 시즌2 제작을 발표했다. 반면, 넷플릭스의 야심 찬 포부를 담고 공개된 <카우보이 비밥> 연이은 시청자 하락세를 보이다 시즌1 완결이라는 굴욕적인 결말을 맞고 말았다. 넷플릭스의 11월이 특히 기다려졌던 건 <카우보이 비밥>과 <아케인>이 각각 원작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바탕으로 각색된 작품이라는 점 또한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두터운 원작 팬층과 그들의 기대는 흥행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지만, 팬인만큼 작품에 더 까다롭게 반응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의 극명한 대조는 흥미롭다.

    사실 지금까지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쇼들을 생각했을 때, <카우보이 비밥>의 실사 드라마의 만듦새는 다음 시즌을 기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오히려 평균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확 잡아끄는 면 없이 그런대로 미적지근하게 흘러가는 것이 넷플릭스 제작 쇼들의 ‘컬러’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원작 애니메이션도 전개 자체는 슴슴하고 허무하다. 이런 면에서 <카우보이 비밥>은 원작을 굉장히 존중하고 있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드넓은 우주와 행성 도시들의 CG는 공을 들였음을 한눈에 알 수 있으며, 용도를 알 수 없는 버튼과 기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실사 비밥호의 조종간과 내부 전경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넷플릭스의 결에 맞게 재해석된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이다. 실사로 만나게 되어 한층 더 귀여워진 천재 강아지 ‘아인’은 물론이고, 페이 발렌타인과 줄리아를 필두로 한 여성 주역들의 재해석은 신선하게 다가옴과 동시에 재구축된 비밥의 세계에 위화감 없이 녹아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사 드라마의 비밥은 어딘가 붕 떠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이는 정작 원작 애니메이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녹아들지 못한 채로 튕겨져 나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원작이 아무리 슴슴하고 허무하다 해도 지금까지 회자되며 두터운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원작만이 가지고 있는 세련됨(영원히 촌스럽게 느껴질 일이 없을 듯한 오프닝이든지)과 이따금 작품을 타고 오는 전류 같은 전율과 짜릿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밥’의 이런 맛을 사랑하고 기대했던 팬들은 자연스럽게 등을 돌리게 되고, 원작을 접하지 않은 채 새로이 유입된 시청층도 가면 갈수록 어딘가 시들해지는 작품의 에너지에 머지않아 물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아케인>의 포스터(좌)와 3화中 실코에게 안긴 파우더(우)

  그렇다면 <아케인>은 어떠한가. <아케인>은 게이머든 아니든 간에 모를 수가 없는 AOS 장르의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둘도 없는 자매였다가 갈라서게 된 ‘바이’와 ‘파우더’를 주축으로 지하 빈민가 ‘레인즈’와 마법 공학의 수도 ‘필트오버’를 오가며 두 도시의 갈등과 역동을 그려내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아케인의 서사는 작품 바깥을 넘나들며 전개되는데, 이는 포스터와 주제곡 ‘Enemy’의 뮤직비디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각각 정지된 이미지와 동적인 이미지라는 대비되는 폼으로 바이와 파우더의 대립과 갈등을 바깥에서 보여준 뒤 이를 다시 <아케인>으로 끌어들이면서 작품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를 찬찬히 뜯어보면 치밀함과 섬세함이 돋보인다. 포스터에서 파우더를 끌어안고 있는 바이의 보호자 역할이 작품 안에서는 실코로 대치된다. 뮤직비디오는 파우더의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Enemy는 작중 바이의 시점에서 두드러지는 OST이다. 포스터와 뮤직비디오는 홍보수단으로써 시청자를 끌어들이고, 이러한 대비 이미지를 작품에서 되풀이하여 <아케인>의 주된 서사와 갈등을 한층 더 또렷하게 각인시킨 뒤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대비와 대치는 바이와 파우더로부터 시작하여 작품 전반을 에워싸는 테마이다. 과거 같은 이상을 품고 형제처럼 동고동락하던 친우 밴더와 실코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대립하게 되고, 갈등을 빚게 된다. 실코와 갈라선 후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지하도시를 통솔하며 바이와 파우더 자매의 양부 노릇을 하던 밴더는 암암리에 세력을 키워 모략을 꾸미던 실코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지하도시는 실코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졸지에 양부를 잃고 언니에게 배신당한(당했다고 오해한) 파우더의 보호자 자리 또한 실코가 꿰차게 된다. 필트오버의 상급 집행자인 그레이슨은 두 도시의 균형을 위해 밴더와 내통하며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로, 충성심 강한 부하 마커스는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마커스 또한 그레이슨과 밴더가 지하도시의 내란으로 명을 달리하게 되자 새로운 레인즈의 수장인 실코와 내통하게 된다. 자신의 상사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동생을 눈앞에서 놓치고 마커스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게 된 바이는 옥살이를 하며 레인즈와 필트오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정체된 생활을 하다가 파우더를 대신할 새 파트너를 만나게 된다. 바로 필트오버 의회 위원 가문의 여식이자 집행자인 케이틀린이다. 대립과 대비, 대치의 모티프는 작중의 다른 인물들에게서 끝없이 반복되며,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 고뇌를 효과적으로 조명하는 장치가 된다. 인물들의 이러한 입체성은 작품의 최후반부, 파우더에 의해 바이, 케이틀린, 실코가 사자대면하게 되면서 극에 달한다. 파우더와 징크스란 이름이 적힌 의자 사이에서 줄을 타며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던 파우더가 끝내 ‘징크스’가 되기로 택하면서 시즌은 막을 내린다. 이는 유년시절 자신의 약점이라 여겨졌던 정체성의 전복이자, 언니를 향한 배반임과 동시에 선전포고이며, 스스로에게 새 이름(그러나 과거에서 가져온)을 부여함으로써 파우더였던 시절의 자신을 대치하고 회생을 꾀하는 일인 것이다.


    <아케인>은 6년의 제작기간이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듯 어떤 경지를 넘어섰다고 볼 수밖에 없는 카툰 렌더링과 이를 십분 이용한 인상적인 연출, 적재적소에 배치된 뛰어난 OST, 1분도 허투루 하지 않는 촘촘한 회차 구성, 독자적인 세계관과 서사로 원작 팬은 물론 게임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2021년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아케인>의 견고한 만듦새가 ‘비밥’을 제치고 11월의 영광을 거머쥘 수 있도록 한 승인勝因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아케인> 시즌1의 마지막을 장식한 스팅의 곡 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카우보이 비밥>에 헌사해야 할 듯 하다. 완벽한 나날에 작별의 키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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