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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카고 라디오 Jan 22. 2022

"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2022년 1월 3일에 쓴 글을 올리며.

몇년 전 어느 할일이 없던 연휴, 5년 이상 시카고 지역에 살면서도 한번도 가 본 적 없던 시카고 대학 캠퍼스를 방문했다. 그 때 마침 우리 그룹을 이끌며 교내 투어를 진행한 학생은 한국계 미국인 여학생이었다. 나는 그 학생을 만나고 평범하지 않은  점을 여럿 느꼈다. 전공에 대한 생각도, 대학에 오기 전 했던 일들도 모두 대단히 자발적이며 주도적이었다.
그 때 생각했다. '핏' 이 맞는 학생을 뽑는다는 그 요상한 말이 진짜 사실이었나 보군!
위스컨신의 작은 마을 출신인 그 학생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대입 제도에 대한 나의 무지함을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작년 연말에 가까운 집안의 아이가 아이비리그의 한 대학에 합격했다. 나는 격하게 축하했다. 글자 그대로 내 일처럼 기뻐했으니 말이다. 이 아이는 대학에서 비아시안으로 분류한 학생이다.
그런데 이 학생은 주도적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어떤 클럽에 가입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든 것을 아버지가 결정했다. 심지어 일찍 생일이 지나서 만18세 성인인데도 성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이가 안쓰럽다고 학생의 엄마가 이야기 했다. 수퍼리치로 여겼던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야 평소에 하고 싶던 클럽에 가입했고 만나지 않던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아이비리그 입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서 출발하는 단상을 남겼다.


2021년 12월 중순부터 

주위 고등학교 4학년들, 한국의 고3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대학 입시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조기에 대학에 지원하는 Early Action (EA) 나 Early Decision (ED) 에 대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다수가 아닌 일부 학생의 결과에 불과하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소식을 들으니, 적어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어떤 아시아계 학생들 그리고 어떤 비아시안 학생들이 유명 대학에  입학하는지 대략적인 유형을 알게 되는 듯 하다. 더불어, 그 유형에 내 아이들이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아이들은 한 분야에 대해 어려서부터 미국 전역에 이름을 떨칠 정도의 대단한 수재들도 아니고, 헌신적인 사회 활동으로 시카고 트리뷴 같은 신문에 이름을 올리는 학생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위의 공기와 우리 아이들의 현 위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인생이 잘못되는 것이 아님을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겠다고 늘 생각한다. 아니 사실 이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에 대해 별 특별한 생각이 없다. 내가 느즈막하게 공부를 하면서 특히 성실함이 대학 공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는 것, 그리고 젊은 시절의 나는 지금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기 때문일까. 나는 다만 내 아이들이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을 할 줄 아는 자세로 대학에 진학하길 바랄 뿐이다.


흔히 입시는 국지전이라 하는데 

그것은  결국 학생이 속한 지역 내에서 평가 받고 선발되기 때문에 거주하는 지역의 학생들간의 비교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나는 시골이나  비교적 규모가 적은 도시는 잘 모르지만, 내가 거주하는 곳과 같은 대도시와 그 인근 지역 학생들은 그들이 얼마나 지역의 인프라를 잘  활용해서 자신의 장점과 능력을 발휘하고 학교와 지역 사회에 기여했는지 평가받는 것을 보곤 한다.


거기에 더해 해를 지나며 명확히 느끼는 점 하나는 

'인종'  이라는, 학생들이 전혀 바꿀 수 없으며 타고난 '그것'이 상당한 변수라는 사실이다. 대학 역시 특히 학생의 인종을 고려해서  평가가 실제로 많이 다른 것 아닐까 싶을만큼 적어도 우리 지역의 경우 아시안 학생과 비 아시안 학생의 대학입시 결과는 수년에 걸쳐  일관된 특징을 보인다. 소위 탑 공립으로 분류되는 이 지역에서 아시안 학생은 국제적인 성과를 올렸거나 만능으로 보이는 학생이 아니라면 엘리트 대학 합격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비아시안 학생의 경우 아시안 학생의 성취 수준과 차이가 나도 합격증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학생들이 어디가 부족하다는 건 아니다. 그저 아시안인 내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오히려 입학사정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 뿐이다.


고작 스무 살도 안된 아이들이 집을 떠나서

처음으로  가는 곳에 발을 딛을 때 인종이 하나의 변수가 되는 것이 당황스럽지만, 사실 미국 내 상당수의 특목고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  인종을 변수로 하여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으로 공식 평가 지표를 조정하고 있다. 이것을 여러 인종에게 고른 기회를 주려는 '정치적인 올바름의 실현'이라는 관점으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 '좋은 고등학교의 자리'를 요구하는 측도 그 그룹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는 동기가 크기 때문이다. 결국 어린 학생들에게 고등학교를 갈 때부터 네 실력이 아니라 너의 인종이 네가 기울인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 문제는 내가 서너줄 적은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대표적으로는 뉴욕 타임즈의 독자들이 뉴욕의 고등학교 입시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는데 대해 이것이야 말로 어린 학생들에게 옳지 않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라며 갑론을박 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고작 중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이 어른도 납득하기 힘든 것을 고려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니,

대학이든  고등학교든 입시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도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네 아니네, 그것에 의한 결과가 아님을 확실히 하자. 태어날 때부터 얼굴 생김새 때문에 출발을 뒷줄에서 하고, 또 어쩌다 보니 운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아이의 보호자와 학생 자신이 이 방대한 입시 제도에 대해 알고자 나름 노력했어도 결과적으로는 무지해서 잘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좋은 결과를 얻은 아이가 자랑스러운 이들,
아직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지인들에게
속으로만 생각할 뿐 아무런 말 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 학생들이 겪어가는 이 과정과 결과가
오롯이 그들의 노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안다.

요즘 대학/대학원 학생들과 공부를 하며 새삼 느끼 건데, 

결국 고등학생들이 어디라도 대학에 진학한다고 가정하면 무엇보다 나는 마지막엔 이 3가지를 마음에 새기고 대학에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1. 대학은 인생의 끝도 시작도 아닌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이어진 시간이 통과 하는 하나의 문이며,
2. 그 문을 지나 어떤 캠퍼스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모든 교수는 자신이 쌓은 지식을 전수하는데 여념이 없으며,
3. 사람들은 대학 랭킹을 매기기 좋아하지만 유명하든 안유명하든 그 어느 대학의 교수도 공부를 적게 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제대로 배우려면 어디서든 열심이어야 한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대학은 확실히 공부를 하기 위해 가는 곳. 때문에 정말로 공부 자체가 맞지 않고, 자신의 과제를 스스로 해내지 못할 정도로 게으르다면 안가는 것도 좋은 결정이다. 철이 들었을 때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오랜 만의 글. ED 와 EA에서 좋은 결과를 받고 한시름 놓는 소수의 지인들과 달리 이제 막 다수의 대학에 지원을 완료하고 올 봄에 나올 결과를 기다리는 많은 지인들을 보며 문득 드는 생각을 우선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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