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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뜬 May 09. 2023

사막의 아이 1화

1화


사막의 아이



1화. 운명의 칼날에 베이다



화마가 신당수를 집어 삼켰다.


천년동안 마을을 지켜왔다던 아름드리나무조차 파도 같은 불길 앞에선 자연의 법칙을 따랐다.


그렇게 마을은 타올랐다.



어두운 밤하늘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니 거꾸로 노을이 다시 올라오는 듯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옥을 방불케 했던 비명소리들도 이제는 간혹 적막만 깨는 소리가 되었다.



타닥타닥.



소년 옆에서 성난 짐승 같았던 불길은 이제 모닥불 같은 소리를 낸다.


눈물조차 순식간에 말려버렸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더 이상 삼킬 것을 찾지 못한 불길이 땅으로 수그러들었지만 소년의 고개만은 꿋꿋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



말을 끌고 오던 남자가 멈춰섰다.



쿵!



남자가 말에서 내리면서 시체의 머리를 밟았다.


얼마나 무거웠던 것일까?


시체의 머리가 남자의 발에 우악스럽게 터져나갔다.



말에서 내린 남자는 매우 커다랬다.


그의 팔뚝 하나가 소년의 몸뚱이보다 더 커보이는 듯 했다.


기형학적으로 온몸에 새겨진 문신과 그 문신을 그물처럼 덮은 흉터들이 남자를 더 위협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소년은 사내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서쪽의 사막에서 건너온 사막의 족속들이었다.


이들이 지나간 곳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는다고 했는데 진실로 그러했다.



“소년아. 부모가 죽었느냐?”



무심한 얼굴로 말하는 사내.


본인이 침략한 마을에서 마치 제 3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그의 모습은 기괴한 느낌마저 풍겼다.



“아뇨.”



소년의 눈빛은 수그러든 불길보다 더 붉게 타올랐다.


남자의 심드렁한 표정이 조금은 흥미롭다는 듯이 바뀌어 있었다.



“...음. 그렇다면 너의 동무들이 죽었느냐?”



이번에도 물음은 이어졌다.



“아뇨.”



사내는 의아했다.


이 마을에 아마도 살아남은 것은 눈앞에 있는 아이가 전부일 것이다.


마을이 완전히 불타올랐음에도 도망치지 않은 아이.


사막의 부족의 지도자이자 위대한 영혼의 계승자인 자신을 향해 붉은 눈초리를 감추지 않는 소년.



소년의 기세는 바람 한 줄기에도 흩어질 것이었으나 칸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칸은 이런 부류의 자들을 알고 있었다.



지옥의 염화에서도 꺾이지 않는 자들.



이런 자들은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그것이 비단 전투만이 아니라 학문이든 정치든 혹은 그 무엇이든 그랬다.



“그렇다면 너는 왜 울고 있느냐?”



소년은 칸의 말에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난...”



칸의 뒤로 부족원들 수십이 나타났다.


하나 같이 기마를 위에 올라탄 채 칸의 등 뒤에 일렬로 섰다.


아마도 습격 당시 도망친 사람들을 모두 처리한 모양이었다.



“난 기회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의 말에 칸의 눈에 의뭉스러움이 실렸다.



“기회를 잃었다?”


“이들은 나의 부모를 죽였으며, 나의 친우들을 죽인 자들.”



소년이 불타오르는 집들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원수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당신에게 빼앗겼습니다.”



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실제로 소년의 머리색은 이 지역의 것이 아니었다.


밤빛을 꼭 닮은 흑발.



‘남쪽 바다 건너에서는 검은 머리를 가진 것들이 태어난다 했었지.’



먼 길을 유랑해온 상인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남쪽의 사람들은 칠흑처럼 어두운 머리칼을 가졌노라고 말이다.



칸이 침략한 이곳은 서역의 땅이었다.


서역에서는 노예거래가 횡횡했다.


그 중 가장 값비싼 최상등품이 남쪽 바너건너에서 잡아들인 검은 머리 아이들이었다.


최근 개발된 함선 덕분에 노예상인들은 남쪽바다 먼 거리에 있는 나라까지 한 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때때로 학살이 이뤄지기도 했고 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늘 생기는 것이 전쟁고아들.


노예상인들에게는 이보다 노다지인 곳은 없었다.


그래서 노예상인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목숨걸고 함선에 합류하길 원했다.



물론 그렇다고 검은 머리칼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수도의 왕족들에게 팔려 가니까 일반인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동쪽의 사막에 사는 칸도 검은 머리칼을 가까이서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복수할 기회를 빼앗겼다라...”



칸은 아이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당돌한 저 눈빛은 슬픔에 찬 복수의 빛깔이 아니었다.



저것은 악에 받친 억울함.


원을 풀지 못했다는 한.



소년의 눈빛은 타오르는 듯 했지만 강철처럼 차갑고 또 찌릿한 것이었다.


칸은 그제서야 완벽히 소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검을 품은 소년이구나”



칸이 소년을 향하여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집을 던졌다.


단검집은 정확히 소년의 발 앞에 툭 떨어졌다.



소년은 말없이 단검집을 바라보았다.


하얀 단검집은 코키리의 상아 같은 것으로 만든 듯 했다.


마치 아지랑이를 새겨넣은 듯한 음각이 들어가 있었고 짙은 갈색 가죽끈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기회를 주마. 나는 네가 그 검으로 무엇을 하든 움직이지도 힘을 쓰지도 않겠다.”



칸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있었지만 기마병들은 전혀 동요치 않았다.


이것은 절대적인 충성.


무엇을 이야기하든 그들은 그저 따를 뿐이다.



소년이 검을 집어 들었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을 뽑자 날카로운 소리가 소년의 귓가를 때렸다.


단검은 한 눈에 봐도 잘 벼려진 것이었다.


주변의 불길에 반사된 빛이 단검을 더 황홀한 빛으로 물들였다.



소년은 오른손에 힘을 꽉 준 채 단검을 들었고 단검집은 버렸다.



소년은 모른다.


눈앞에 저 산처럼 서 있는 남자가 정말로 가만히 있을지.


혹은 그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이 자신의 목을 노릴 수도 있었다.



아마도 저들 중 누구든 소년을 향해 발길질 한 번만 하면 소년의 목숨은 그대로 날아갈 것이다.


빼빼 마른 소년의 몸은 바람에도 꺾일 듯이 볼품이 없었고 사내들의 몸은 치열하게 단련되어 무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이내 발걸음을 칸에게로 옮겼다.


남자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소년은 생각했다.



‘기회는 주어졌고 그렇다면 행동할 뿐이다.’라고.



소년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칸은 정말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뒤에 있는 기마병들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소년은 손이 부숴져라 힘을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내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고 싶었으나 역부족일 듯 했다.


사내의 키는 소년의 머리 한참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일직선으로 사내의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향해서 칼날을 겨누고 휘두른다는 것은.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무서움? 두려움? 그런 것 또한 없었다.


그저 무의 세계 속에서 주어진 기회 안에서 휘두를 뿐이었다.



이미 오래전 소년의 삶은 끝나 있었다.


어느 날 북쪽의 이족들이 바다 건너 쳐들어왔을 때 소년이 살던 마을은 지금처럼 완전히 불타올랐다.


부모도 친구도 옆집의 할머니도 모두가 그들의 소총과 칼날에 죽어 나갔다.


이후에 군대가 몰려왔으나 이미 마을에 남은 것은 재뿐이었다.



소년은 바다를 건넜다.


노예상인에게 목줄이 채워진 채로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서 바다를 건넜다.



소년의 눈은 흐리기만 했다.


영혼을 빼앗긴 듯, 그날의 불길에 모든 걸 다 태운 듯 아무것도 남지 않은 눈동자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소년에 눈에는 무엇인가 차올랐다.


복수, 분노, 생존본능, 슬픔. 온갖 감정들이 소년의 눈동자의 빛을 돌려 놓았다.



쨍그랑!



“크윽...!”



소년이 손을 크게 베였다.


단검을 처음 쓰는 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였다.


제대로 단검을 잡지 않으면 찌르는 순간 손이 밀려 나가면서 베이기 마련이었다.


물론 제대로 잡는다고 말라비틀어진 소년의 악력으로는 누군가를 제대로 벨 수조차 없었다.



또한 찌르는 대상이 얼마나 단단한지 혹은 무른지 판단해야만 한다.


사내의 몸은 마치 바위와 같았다.


칼날과 사내의 옆구리가 부딪히는 순간 마치 철에 부딪힌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소년은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울거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저 패배감에 휩싸인 채로 사내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너의 검은 잘 봤다”



칸이 나지막히 말했다.


그리고 그가 떨어진 단검을 주워 들었다.


소년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을 했다.



눈 앞에 있는 거대한 사내는 그야말로 태산이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 서 있을 뿐인데 소년의 세상은 이미 반쯤 종말을 맞이한 것 같았다.



하지만 칸은 단검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따.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크게했다.



“나 사막의 후손이며 위대한 영혼, 자르지아의 후예 칸이 명한다!!”



쩌렁쩌렁 목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충!!!”



기마병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한쪽 다리를 꿇고 칸의 명령을 받들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칸의 목소리에 굴복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 시간부터 이 소년은 언제든 나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충!!!”



“또한 사막의 일원으로서 자르지아의 품으로 인도할 것이다!!”



“충!!!”



그리고 칸은 힐끔 소년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히 말했다.



“이제 떠난다. 전쟁은 끝났다.”



마지막 칸의 말에 일제히 모든 기마병들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폭발하듯 양팔을 들어올렸다.



“와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곳에 우리가 있으니 누구라도 오라는 듯이.


우리가 있는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소년의 귀에도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렸지만 이내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동안의 여정이 눈앞에 파노라마로 지나갔다.


잊은 줄 알았던 부모님과 동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소년은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그토록 그리웠던 모든 것들이 이리 생생하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냐고.



칸의 눈은 쓰러진 소년에게서 자신의 옆구리로 향했다.


태(態)로 단련된 옆구리에 작고 긴 상처가 나 있었다.


물론 누군가 보면 어디에 긁혔나 싶을 정도의 상처이긴 했다.



하지만 기마병 중 누군가 이 상처를 보았더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칸은 사막에서 가장 강한 강철의 태를 단련한 자였다.


그리고 그 금광석과 같은 능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 13년간 철권통치를 해온 인물이 지금의 칸이었다.



‘검이 아니라 마음으로 벤 것인가?’



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소년이 쥔 것은 본인이 던져준 단검 따위가 아니었다.


코끼리 왕이라 칭한 녀석의 상아로 만들었을지라도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



종종 아주 미약한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키고는 한다.


몇십 년을 수련한 검사도 맞서지 못하는 거대한 태풍 속에서 부모는 아이를 감싸 안고 절대로 날아가지 않는다.



소년의 검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소년은 극소수의 검사들만이 도달한다는 개화(開化)를 일순간이나마 보여주었다.



열 살? 열한살은 되었을까?


아마도 이 나이대에 개화를 사용한 세상의 유일한 소년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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