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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도밤 Oct 27. 2024

워싱턴 여행기(1): 더 아메리칸 인디언 국립박물관

승리자가 기술한 인디언 역사

보스턴 입성 80일을 기념해서(?) 2박 3일의 짧은 워싱턴 여행을 다녀왔다.

여러 곳을 스치는 것보다 한 곳을 진득하니 오래 보는 것을 좋아해서 제대로 본 장소라고는 딱 세 곳 정도.

굵직한 개성을 가진 세 장소의 여행 후기를 차례차례 남겨 두려고 한다.



더 아메리칸 인디언 국립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Old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D.C.)

국립 흑인 역사 문화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더 아메리칸 인디언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


점심즈음 워싱턴 공항에 내리자마자 처음 찾아간 곳이 인디언 국립박물관이었다. 자연사박물관이나 유명한 그림 있는 미술관을 많이들 간다지만 딱 미국에서만, 딱 워싱턴에서만 보고 배울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사실 박물관 카페테리아에서 인디언 전통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음식들이 무척 맛있다는 말을 듣고 혹해서 결정했다는 건 안 비밀..


박물관 전경과 내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들은 어디나 널찍하고 웅장해서 건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착하자마자 카페 가서 점심부터 먹었다.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기도 하고..^^;

푸드코트처럼 나름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음식들을 파는데 내가 둘러보며 구경하니 서로 인사하면서 자기들이 파는 음식을 소개하셨다. 직원 분들이 다 네이티브 아메리칸인 것 같았는데, 한국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에서도 네이티브 아메리칸을 처음 만나봐서 속으로 조금 놀랐다.


Peppercorn-crusted cedar-planked salmon이라는 음식을 먹었다.


막상 고르려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김밥천국 메뉴를 보는 외국인 관광객의 느낌이 이런 건가 싶었다. Peppercorn-crusted cedar-planked salmon이라는 이름의 연어구이에 Sunchoke and yukon potato mash, Wild rice salad를 사이드로 곁들여 먹었다.


받아 놓고 보니 조금 더 새롭고 도전적인 요리를 시도해볼걸 싶기도 했다. 맛있는 연어구이, 맛있는 매쉬포테이토, 맛있는 퀴노아 샐러드구나 하면서 먹었는데 뒤늦게 찾아보니 삼나무에 연어를 굽는 요리법이라든가.. 돼지감자와 유콘 감자를 쓰는 음식의 재료라든가 하는 점들이 특색 있는 부분이었나 싶다. 나중에 다른 박물관에서 보니 인디언 요리법이 굉장히 다양한 것 같았는데, 더 다양하게 못 즐겨봐서 아쉽다.


미국 속의 인디언(왼쪽), 전세계 팬트리 속의 인디언 음식(오른쪽). 뜻밖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인디안밥'이 있다는 건 좀 부끄러웠다;;


열린 전시는 거의 다 돌아보았다. 미국인도 아니고 인디언에 대해서도 배경지식이 없는 외부자이니 전시를 보고 이해하는 시선에 한계가 분명 있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쉬웠다.


상설 전시, <Americans>는 "인디언의 문화와 이미지가 미국의 정체성으로 미디어와 곳곳에 남아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스포츠팀과 미사일과 상품의 이름들에, 어디에나 인디언이 있고 인디언이 미국 정체성의 한 일부라는 것이다. 주류 사회에 '녹아들어 있는' 인디언의 '흔적'이 전시의 메인 테마가 된 셈인데, 철저히 정복자, 승리자의 시선에서 짜여진 전시가 아닌가 싶었다.


이 전시를 통해 정작 인디언들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국 여행객이자 관람객으로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소위 인디언으로 불리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 얼마나 다양하게 존재했고, 각각의 부족은 어떻게 다르고, 어떤 풍습을 가졌고, 지금은 어떤 자부심을 가지고 어떻게 문화를 이어가며 사는지, 같은 내용이었다. 어릴적 교과서에서 읽었던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처럼, (우리는 다 형제고, 땅은 우리의 터전인데 어떻게 땅을 사고파느냐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디언의 사상, 자연과 더불어 사는 태도, 지혜 같은 정신 세계도 알려줬으면 했다. 인디언에 대해 자세히 알도록 하는 것이 상설전시의 목적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각기 다른 개성을 가졌을 여러 부족들은 모두 '인디언'으로 뭉뚱그려져 있었고 체로키족이니, 나바호족이니 하는 부족들의 이름조차 (내 눈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인디언 추장 옷을 입은 스누피는 정말로 미국 문화 속 인디언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깃털 모자를 쓰는 인디언은 어느 부족인지, 그 부족은 왜 깃털로 모자를 만들어 쓰게 되었고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지, 깃털 모자를 쓰고 어떤 의례를 하는지, 그런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인디언 부족 옷을 입은 스누피가 정말 미국 인디언의 정체성일까?


특별전시 중에는 '신대륙 개척자들과 인디언 부족들이 처음 맺은 약속은 상호 평등했는데, 그대로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아쉽지만, 이제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등의 주제도 있었다. 객관적인 척하지만 사실 백인 입장에서 평가된 역사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인디언을 몰아내고 이 땅의 새 주인이 된 승리자들이, 그들의 운명과 가치를 평가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주체는 자신들이라는 시선 아래 써 내려간 이야기인 것 같아 영 불편했다.


충분히 아쉬울 만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다음날 흑인 박물관을 갔기 때문이다. 미국 땅에서 비주류로 핍박받으며 살아 왔던 또 다른 사람들의 박물관은 이곳과 매우 달랐다. 흑인 박물관은 비로소 힘을 얻은 흑인들이 진심과 고민을 담아 진지하게 풀어낸 생존기라고 느껴졌고, 인디언 박물관은 백인들이, 여전히 힘이 없는 인디언의 자문을 받고 그들의 유물을 이것저것 사다가 구성한, 알맹이 빠진 존중이라고 느껴졌다. 고작 하루 본 아시아 관람객의 박한 평가라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쨌든 이 박물관은 인디언 부족들의 흥미로운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각 층 복도에 이것저것을 늘어 놓았기에 구경했는데, 인형, 놀이도구, 식기 등 여러 부족 유물들을 유형에 따라 모아 두었을 뿐 스토리텔링은 없었다. 매력적인 전시 내러티브에 얹어서 유물을 사용하던 사람들의 생활과 일상을 느낄 수 있도록 보여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서 다시금 아쉬웠다.


가장 와닿고 귀여웠던 cradleboard 유물. 아기 얼굴만 쏙 나오게 보드같은 걸 만들어서 등에도 들쳐업고 말에도 매달고 다녔나보다. 너무 귀여웠다.


왼쪽은 Apsáalooke족 여자아이 의상과 Pikuni족 아이들의 인형. 귀한 엘크 이빨로 옷을 장식하는 것이 가족의 자부심을 나타내는데, 인형에도 비슷한 옷을 입혔다는 설명


뮤지엄샵이 규모가 크길래 지갑을 활짝 열고 세 번은 돌았는데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딘가 모르게, 뭐랄까, 산 중턱의 휴게소 같았다. 어르신 취향이거나, 조잡하거나. 젊은 세대가 가볍고 센스 있게 즐길 수 있는 통통 튀는 아이템이 없었다. 역시 자본과 관심의 부족으로 인한 문제인 것 같아서 씁쓸했다. (그냥 물건들이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규모에 비해 막상 살 건 없었던 뮤지엄샵. 여러 세대에 맞는 센스 있는 아이디어가 부족했던 듯싶다.


왠지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가 계속 생각나는 박물관이었다.

그 소설을 두세 번 읽고서도 조금 너무 과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박물관을 가만히 돌아보니 소설 속 '소수 언어 박물관'과 인디언 박물관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웅장한 박물관 한가운데에는 원형 공연장이 있었다. 가끔 인디언 전통 공연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았다. 이 공연의 관객석에는 누가 앉을까? 인디언들은 이 박물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 박물관에 방문한 'Native American'들은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며 뿌듯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알고 싶던 정보는 얻지 못하고, 더 많은 궁금증만 안고 돌아가는 박물관이었다.


난 그들의 마음을 잘 모르겠고 판단할 수도 없어서 네이티브 아메리칸 작가가 인디언 정체성에 대해 썼다는 소설을 한 권 샀다. 이 소설은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까?


"Great Nations Keep their Word". 위대한 나라를 구성하는 they에 인디언은 있을까? 없을까?


여행 중 동네 서점에 들러 산 소설. 샤이엔 + 아라파호 출신 작가가 아메리칸 인디언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해 쓴 연작 소설이라 한다. 이 소설은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까?




중앙에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 곳곳의 언어를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이 단지를 세웠다. 결과는 그 반대였다. 그리고 그건 중앙에서 내심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 김애란, <침묵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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