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의 9월 새학기 풍경들
미국 대학은 3월이 아니라 9월에 새학기의 재잘거림으로 북적인다. 개강이란 단어에 감흥이 없어진 지 꽤 오래였는데, 오랜만에 개강의 설렘을, 그것도 수업을 듣는 당사자로서 느껴 보는 한 달이었다.
이번 학기에는 두 개의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한 수업은 펠로우십을 주최한 지도교수님이 열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기호인류학 강의. 한 수업은 스스로 선택해 메일로 청강 허락을 받은 역사언어학 강의. 기호학 강의에서는 한마디라도 주워들으려 애쓰며 벙찌게 앉아 있지만 언어학 강의는 한마디도 놓치기 싫은 즐거움에 빙글거리며 앉아 있다. 양 극단이지만 어쨌든 한없이 즐겁다.
청강생으로 새학기의 캠퍼스를 누비며 스쳤던 생각의 조각들.
"대학은 이런 곳이었지"
어느 대학에서나 개강 첫 수업은 비슷한가 보다. 교수는 자신이 개설한 강의의 주제와 개괄을 설명하고, 수강생들은 이 강의를 들을지 말지 고민하며 교수의 말을 듣는다. 기호학 강의 교수는 젊고 열정이 넘친다. 간단한 그림 몇 장과 깔끔한 문장들로 수강생의 집중력을 단숨에 끌어당긴다. 언어학 강의 교수는 여든을 훌쩍 넘긴 노교수다. 미국 대학은 정년이 없다더니, 허리 굽고 머리 하얀 교수님이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흑판에 글씨를 쓴다. 두 강의 모두, 서로 다른 면에서 정말 미국 대학다웠다.
열정과 노력으로 학문을 닦은 선배 학자가, 젊은 학생들에게 자기가 얻어낸 지식을 전수하는 곳. 호기심으로 눈과 귀를 연 젊은이들이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지식을 듣고 적고 물으며 배우는 곳.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가장 대학다운 모습이었다. 한때는 나도 수업이 어려울지 쉬울지 머리를 굴리던 수강생이었으나 이제는 교단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 모습을 겹쳐 보게 된다. 대학의 본질에 어울리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가 얻어낸 나의 지식을 넖고 깊게 펼쳐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묘하게 좋은, 책 가득한 냄새
오늘은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큰 와이드너 대학을 투어했다. 하버드에 다니다가 타이타닉호에서 목숨을 잃은 해리 와이드너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기부한 돈으로 지은 도서관이다. 책이 너무너무너무 많은데 도서관 외관은 건들지 않는 것이 기부자의 뜻이었다보니, 안으로 샅샅이, 아래로 깊이깊이 공간을 파서 내부가 미로 같다.
사서께서 가장 깊은 곳의 서고라고 설명한 공간에 들어가니 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지하 공간으로부터 책 냄새가 훅 끼쳤다. 책의 냄새는 익히 알았지만 그렇게 눅진하고 깊게 배인, 책으로만 가득찬 공간에서 나는 냄새는 처음 맡아 봤다. 굉장히 깊은 인상을 주는 냄새였다.
이전에 라디오스타에서 강력 사건을 자주 맡았던 어느 형사가 나와서 말하기를 시체 썩는 냄새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돈 냄새라 했다. 돈을 은닉해 꽁꽁 묵혀둔 공간에 들어가니 시체보다 더 심한 악취가 진동을 해 평생 잊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꼬깃한 지폐 몇 장의 꾸릿한 냄새에도 코가 찌푸려지니 돈으로 가득찬 방의 냄새는 상상하기도 싫지만, 묘하게 강렬한 책 냄새에 둘러 싸여 있노라니 그 형사가 말한 돈 냄새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서관 깊은 지하 공간에서 풍기는, 책 향기의 강하고 은은한 그 느낌처럼 삶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지 같은 건지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서, 하버드 학생이라고 그렇게 다른 건 없는 듯하다. 강의실 뒤편에 앉아서 강의를 듣고 있으면 반은 노트북으로 딴짓 하고 있다. 어떤 애는 교수님의 말과 말 사이에 살짝 공백이 뜨는 그 찰나의 순간마다 화면을 바꿔서 핀볼을 날린다. 머릿속이 쇼츠의 도파민에 절여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내가 본 한국의 캠퍼스 풍경과 하나 다른 것은 강의 중간에 이해가 막힐 때마다 학생들이 손을 번쩍 들고 자연스럽게 질문한다는 것. 교수도 익숙한 듯 강의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소통한다.
한국에서는 강의 끝나고 질문하려는 줄이 길게 늘어섰었는데, 그냥 강의 끝나면 집에 빨리 가고 싶거나 답답한 건 못 참는 미국 학생들의 다른 선택일 뿐 특별한 풍경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또 미국 대학은 소셜 활동이 너무 많다. 대학의 특징이라기보다는 학문 공동체를 지향하는 미국 학계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한 주가 멀다 하고 Faculty club에 모여서 이 그룹, 저 그룹이 스탠딩 파티를 열었다. 물 든 와인잔 들고 왁자지껄한 사람 사이를 살금살금 지나다가 누구랑 눈이라도 마주쳐 버리면 진땀 빼는 시간이 시작된다.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도 않는 영어에 애써 귀를 쫑긋거리며, 사교성 좋은 척 다 알아들은 척 방긋방긋 미소지으며, 똑같은 자기소개를 열 몇 번씩 하고 떠듬떠듬 화제를 꺼내며 고통의 소셜 활동을 견뎌 냈다.
하긴, 왁자지껄한 맥주집에서 기 빨려 가며 앞 자리 선배가 뭐라고 하는지 듣느라고 애쓰던 대학 시절을 생각하니 이것 역시 별로 특별할 건 없는 풍경인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스스로가 손님같이 여겨지지만 캠퍼스 풍경은 제법 익숙해졌다. 이제 존 하버드 동상은 더이상 신기하지 않고, 하버드 발밑의 얼룩이 역해 피해 다니는 보통 사람이 되었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가고, 벌써 두 번째 달력을 뜯을 때가 다가온다. 어떤 날은 새로움의 기쁨, 깨달음의 기쁨, 소통의 기쁨으로 온몸이 가득 찬다. 어떤 날은 조용한 방안에 혼자 누워, 잠든 한국이 깨기만을 기다리며 심심함에 몸부림친다.
흘러가는 하루는 흘러가는 대로 애쓰지 않되, 주어지는 기회는 기꺼이 누려 후회 없는 날들을 채우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