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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로나 Oct 30. 2022

익명성은 좀 지켜주셈

탱고의 닉네임 문화

몇 년 전 ‘부캐’란 용어가 주목 받았다. 본래는 온라인게임에서 주로 쓰인 말이다. 이미 육성한 캐릭터가 있지만, 새 캐릭터를 다른 종족이나 특성으로 키울 때 부캐라는 말을 쓴 것이다. 이제는 유명 연예인이 기존과 다른 이름으로, 새 영역에서 색다른 이미지로 활동하는 일을 설명할 때도 쓰인다.     


부캐 육성은 자신에게 덧씌워진 선입견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얻을 수 있는 효율적 수단이다. 점잖고 단정한 이미지였던 연예인도 부캐를 키우면 맘껏 깐족거릴 수 있다. 부캐라는 이름 아래 대중은 이를 관대하게 볼 것이니 말이다. 부캐는 연예인의 개성을 확장시켰고, 매너리즘에 빠진 이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부캐는 게이머나 연예인이 아닌 이들에게도 자유와 활력을 준다. 일터에서의 내가 ‘본캐’로 활동한다면, 여행지에서나 독서모임, 미식모임 등 취미생활에서는 이와 다른 부캐를 내세우는 것이다. 서로 자세한 신원은 밝히지 않고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며 교류하는 식인데,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공간에서 스스로 드러내길 원하는 정체성을 선별해 표출할 수 있다. ‘다른 공간’에서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고 좀 더 자유로워지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취미생활을 하면서 본캐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나도 가지고 있다. 춤 교습소 밖에서 만날 정도로 친해질 경우라면 개인정보를 차차 공유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교습소 안에선 ‘춤을 멋있게 추고 싶은 익명의 홍대 지역 거주민’ 이상의 신원을 노출할 생각이 없다. 마침 탱고 커뮤니티에는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나는 이런 문화가 반가웠고, 좋은 문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었던 탱고 커뮤니티 내에서! 원치 않음에도 본캐가 끌어올려지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수업이 끝난 뒤 연습 시간, 구석에서 춤을 연습하는 나를 한 수강생이 힐끗거리는 눈치였다. 그가 강사에게 다가가 뭔가 말하는데 채널 이름과 TV 프로그램의 이름이 들려다. 해당 채널의 교양 방송에 출연하고 있기에, ‘혹시 내 얘기 하나?’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의식 과잉을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살자’라는 온라인 격언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불행한 예감은 잘 틀리는 법이 없지. 불행히도 내 얘기였다. 그의 얘기를 들은 강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곳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들을 수 있을 큰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분이 그러는데, TV에 나오시는 분 맞아요? 000씨라고….”
“아니오!”     


나도 모르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부정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선명한 기억이 없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허둥대다 집에 왔던 것 같다. 귀가길 머릿속에는 여러 의문이 시끄럽게 떠올랐다. 이런 의문이었다. 마스크도 썼는데 어떻게 알아봤을까? 내가 너무 나대서 눈에 띄었나? 그렇더라도 개인적으로 다가와 조용히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건 일종의 ‘아팅’과 같지 않나?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데 그를 포함한 다수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며 닉네임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나만, 교실 모두에게 본캐가 노출되는 상황은 부당하지 않은가? 혹시 내가 불편한 마음을 가져 앞으로 수업에 안 나오길 바란 걸까? 악의는 없었고, 그저 상대가 불편할 가능성을 떠올리는 배려심이 없을 뿐이었을까...? 

    

나는 그날 내가 겪은 일이 폭력적이었다고 느낀다. 그곳에서 더 이상 부캐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춤출 수 없을 것 같았고, 그곳을 향하는 발걸음뜸해졌다.      


나와 같은 공간을 쓰는 이들이 내 본캐를 인식하더라도, 적어도 개인적으로 조용히 물어보는 매너가 있는 이들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물론 묻더라도 사실대로 답하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본캐를 공유하지 않는 것은, 아직 당신과 그만큼 안 친하단 뜻이다. 나중에 친해지면 자연스레 터놓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호기심을 좀 참아주길 부탁한다. 사실 그냥 모른 척해주는 게 제일 좋겠지만….


가면무도회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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