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외국인 앞에서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되어본 적 있는가? 나는 종종 있다. 여행을 떠난 나라에서 그 나라 언어를 잘 못할 때 특히 그랬다.
30대 이후 크게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른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에게 그 나라 말을 할 때면 위축되고 소극적인 자아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평소 안 웃기면 정색하는 편임에도 외국어로 대화할 때는 웃기지도 않은 말에 괜히 웃기도 했다. 바탕에는 스스로를 약자라고 감각하며 상대가 나를 관대하게 포용하길 바라는 마음, ‘말은 좀 어눌해도 인성과 지성에 문제없고 무해한 인간’이라고 피력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소셜댄스를 배우고 출 때도 종종 비슷한 태도를 갖게 된다. 소셜댄스의 속성 때문 아닐까? 음악을 듣고 리드와 팔로우의 역할을 나눠 서로의 해석과 리액션을 주고받는 것. 대화의 속성과 닿아있지 않은가.
좋은 대화가 주는 만족감을 알고 있는 나는, 좋은 대화 상대가 되고 싶다고 욕망한다. 화자의 의도를 적확하게 파악하고 공감을 표하며, 의외성과 재치가 깃든 반응으로 지루하지 않은 흐름을 만들기를 원한다. 둘이 추는 춤을 출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새로운 춤’을 출 때, 욕망은 거듭 좌절된다.
요즘에는 살사와 바차타를 배운다. 배우는 것은 주로 팔로워의 역할이다. 나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좋은 흐름을 만들고 싶다는, 그러니까 리더가 건네는 말을 이해하고 의도에 맞게 반응하고 싶다는 의욕으로 가득 차있다.
바라는 대로 될 때는 드물다. 익숙하지 않은 춤을 출 때, 리더가 제안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움직이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배운지 얼마 안 된 외국어를 듣고 뜻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처럼, 무엇을 말하려다 “어…음…” 하며 버퍼링이 걸리는 것처럼.
내 경우 기존에 배운 탱고의 신호체계와 힘의 작용이 새로운 춤과 다르기에 혼동되어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무슨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고 상대가 신호를 던졌는지 헷갈려 자주 허둥댔다. 그런 내가 답답했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답답하게 느낄 거라는 의식이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불쾌한 일을 겪었을 때 평소처럼 대처하지 못한 까닭은.
토요일 밤 어느 살사바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플로어를 가로질러 걷다 까맣고 기름진 얼굴의 중년 남성에게 붙들렸다. 한 곡 추자는 뜻이었다. 탱고에서는 이런 식의 춤 신청이 결례이고 눈짓으로 은근히 권유한 뒤 눈이 맞아야 춤이 시작된다고 배웠는데, 살사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별 일 아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