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씨.
당신이 감독한 <가여운 것들>이 ‘창녀 판타지를 가진 남성 창작자가 만든 것이 분명하다’며 손가락질 받은 사실을 알고 있나요? 여성주의 영화인 척하면서 실제 여성의 삶에 해를 끼칠 영화라 더 악질이라는 평도 있었죠. 그런 부정적인 감상을 왕왕 접한 뒤였기에, 저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팔짱을 낀 채 <가여운 것들>을 보기 시작했답니다.
영화가 끝난 뒤, 저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관객이 됐습니다. 눈물에 대한 혼란과 영화를 향한 호감을 가진 채로요. 그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모여 <가여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로 했습니다. 준비하며 영화를 한 번 더 봤는데, 역시 좋더라고요.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니 영화가 더 좋아졌고요.
어떤 점이 좋았냐면… (공개 편지라 <가여운 것들>을 보지 않은 사람도 이 글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망설여지네요. 하지만 이것은 영화를 만든 사람과 영화를 본 사람의 대화이니 내용을 말할 수밖에 없겠죠? 안 봤으면서 내용 누설이 싫은 사람이면 알아서 피할 거잖아요?) 모임을 진행하며 분명해진 건데요, 갓윈(윌렘 대포)과 벨라(엠마 스톤)의 관계가 제 마음을 크게 건드린 것 같습니다.
갓윈은 그의 부친에게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실험의 대상이었죠. 갓윈은 과학자 부친의 갖은 실험으로 신체 대부분이 변형되고 훼손된 채 과학자/의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살에 거의 성공한 임부 빅토리아와 마주합니다. 갓윈은 그때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고 훗날 말합니다. “태아의 뇌를 꺼내 여인의 몸에 넣어 살린 다음 관찰하는 것”이었다고요. 여인의 몸과 태아의 뇌가 결합된 존재에게 갓윈은 벨라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여인의 뱃속 아기가 천재의 뇌를 가졌던 걸까요? 벨라의 발달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갓윈은 벨라를 지켜보며 애정을 느낍니다. 벨라가 잠들 때까지 곁에서 동화책을 읽어줄 정도로요. 벨라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갓윈의 영향력 밖으로 나가려는 것도 처음에는 반대하지만, “보내주지 않으면 마음이 증오로 가득찰 거”라는 벨라의 말에 쌈짓돈을 챙겨주며 배웅하죠. 벨라가 떠난 뒤에는 거의 매일 밤 훌쩍이며 포트와인을 홀짝입니다. 그러면서도 감정은 중요치 않다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죠.
시간이 흐를수록 갓윈의 몸은 쇠락합니다. 죽음이 바짝 다가온 그의 앞에, 여러 ‘실험’을 거친 벨라가 좀 더 또렷해진 눈빛으로 돌아옵니다. 갓윈은 벨라에게 진실을 말하고, 벨라는 지금 삶이 즐거우니 자신을 살린 것은 용서하지만 거짓말과 구속은 잊지 않을 것이라 답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죠. 갓윈은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진료소를 벨라에게 물려주기로 합니다.
얼렁뚱땅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갓윈의 제자 맥스(라미 유세프)와 벨라의 결혼식이 열리고, 갓윈도 무리해서 참석하는데… 빅토리아의 전남편(크리스토퍼 애벗)이 결혼식장에 난입합니다. 벨라는 자신이 모르는 신체의 과거를 알고 싶어 전남편을 따라나섭니다. 알고 보니 그는 씹새끼였고, 빅토리아의 자살의 원흉으로 보이며, 벨라는 위험에 처합니다. 다행히 벨라는 민첩했죠. 위기 상황을 피한 벨라는 전남편이 복수하지 못하도록 손을 좀 봐주기로 합니다.
이때 저는 상상했습니다. 갓윈의 뇌를 전남편의 몸에 옮겨 담아 갓윈과의 삶을 연장하는 벨라를요. 하지만 영화는 제 상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래서 더 감동적이고 아름다워진 것 같아요.
갓윈은 그토록 그리워한 벨라의 곁에서 끝까지 과학자적 태도를 잃지 않고 죽음을 겸허히 맞이합니다. 마지막 말은 “흥미롭구나, 죽음을 직접 겪다니”였습니다. 그 태도가 근사했고, 갓윈의 양쪽 곁에 누워 그를 안아주며 죽음의 순간을 함께한 맥스와 벨라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영화를 보며 부친과 저의 관계를 갓윈과 벨라의 관계에 비춰보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들처럼 화해하지 못한 상태이지만요.
저는 부친과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살고 있어요. 일 년에 몇 번 연락을 주고받거나 드물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전부죠. 부친이 제게 준 상처와 그에 대한 무심함을 사과해주길 바랐으나 그 기대는 번번이 무너졌고, 저는 그런 부친을 아직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점점 늙고 약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연민은 샘솟더라고요. 그의 죽음이 아주 먼 일만은 아님을 실감하며, 그가 떠난 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갓윈의 임종을 벨라가 지키는 장면은 저와 부친도 그들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부추겼습니다. 더 나아가 저도 그렇게 외롭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했고요. 오늘부터 제 장래희망은 호상입니다.
갓윈의 호상에서 비롯된 여운을 안고 다가오는 영화를 결말을 마주했습니다. 영화는 갓윈이 물려준 집에서 의사 시험을 준비하며, 일종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벨라의 편안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당 한구석에는 염소의 뇌가 담긴 전남편의 신체가 사족보행하며 풀을 뜯어 먹고 있고요.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긍정하는 듯 미소 짓는 벨라의 얼굴로 카메라가 다가가는데… 엠마 스톤의 탁월한 연기와 벨라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한 음악이 어우러지며, 벨라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앞날이 안심되며 개운하고 후련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가여운 것들>의 마지막 장면이 제게 준 것은 해방의 기운 같습니다. 젊은 날의 실패가 남은 날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어요. 이 영화는 그런 이들에게 모험을 떠날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몸은 어른이지만 어제 뇌를 갈아끼운 천애고아라고 스스로를 여기며 벨라적 사고로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해방 아닐까요? 영화 모임에서도 그런 용기와 격려를 나누었기에 참 좋은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에는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벨라는 운이 너무 좋습니다. 전남편에게서 벗어난 것도 민첩했고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정말이지 위험했습니다. 실험의 과정에서 “몸을 생산수단 삼아” 돈을 벌고 경험을 쌓는 나날의 비중도 필요 이상으로 많게 느껴졌어요. 역시나 운 좋게도, 그러던 중 비가역적인 훼손을 유발하는 폭력과 질병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죠.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현실의 이들에게 가해지는 위험은 영화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일 것입니다.
파리 매음굴 주인, 스와이니 부인이 벨라에게 가스라이팅하며 한 말들 때문에 영화가 성매매를 권장한다고 보일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걸립니다. 계속되는 파리 생활로 “마음이 텅 비어버리고 연민은 서서히 경멸과 분노로 변질되고 있다”는 벨라의 묘사를 보면 그게 의도 같진 않지만, 현재로서는 오해하기 쉬워 보여요. 영화에 대한 많은 비판 역시 의도를 의심하게 되는 과도한 성애 묘사들 때문으로 보이고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당신이 기어코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동력은 파리에서의 벨라의 나날을 그리겠다는 욕망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다고요. 뒤틀리고 굽어진 몸, 기미와 검버섯이 피어난 몸, 살이 겹쳐진 곳에서 냄새가 난다고 묘사되는 주름진 몸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그리고 싶었던 게 당신의 욕망이었다고요. 그리고 뭐… 굳이 의미 부여하자면 그들 모두 ‘가여운 것들’이라고 작품 주제와 연결 지어 볼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요르고스 란티모스 씨, 영화 잘 봤습니다. 이전 작품들보다 삶과 인간에 대한 시선이 따뜻해져서, 응원 받는 느낌이 들어 좋았어요. 당신 작품 덕에 벅찬 마음으로 뇌를 갈아끼운 사람처럼 모험을 떠날 용기가 채워졌습니다. 다음 작품은 더 따뜻해지고 배우들은 덜 벗기길 기대해봅니다.
그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