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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로나 Aug 02. 2024

반항이 체질: '111밀롱가' 편

까베세오, 딴다, 꼬르띠나를 아시나요?


처음 탱고가 내 인생에 들어왔을 때, 신기하고 설레는 일이 많았다.


첫 탱고 수업이 끝나고 강사들이 한 곡에 맞춰 시연을 선보이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상체에는 고요한 에너지만 흐르는 듯 보이는데 하체는 바쁘게 걷고 점프하고 서로의 다리 사이를 채찍처럼 휘감으며 난리도 아니었다. 그게 미리 정해진 안무가 아닌 파트너 간의 리드와 팔로우로 이루어진 즉흥이라는 사실이 경이롭고 멋져보였다.


연습이 아닌 ‘실전’으로써 탱고를 추는 장소(이하 ‘밀롱가’)만의 분위기도 새롭고 설렜다. 그곳을 향하는 걸음마다 음악에 가까워졌고, 닫힌 문을 열면 더욱 크게 음악이 퍼지며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고전적인 분위기의 멋진 옷을 빼입은 남녀들이 춤에 열중한 모습은 영화에서 본 무도회 장면을 현실로 옮긴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새삼스레 내 심장의 박동을 자각했다.


그렇지만 탱고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며 고개를 갸웃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따라야 할 규칙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적잖았다. 대부분 타당했고,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여겼지만… 좀 갑갑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면, 까베세오(Cabeceo)…?


- 까베세오(Cabeceo)

처음 보는 사람과도 춤으로 대화 나눌 수 있는 것이 탱고의 매력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춤을 신청할까? 까베세오, 렛츠고!


까베세오는 머리를 좌우 또는 위아래로 까딱 움직이는 것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Cabeza(머리)에서 파생된 말이다. 춤을 권하기 위해 원하는 상대를 쳐다보며 머리를 까딱, 눈이 마주치고 승낙을 표현하고 싶으면 또 고개를 까딱하는 일종의 대화이다.


이것은 내게 굉장한 눈치게임으로 느껴진다. 춤과 춤 사이 약간의 쉬는 시간, 그 짧은 시간 눈빛이 오간 사람들이 탱고 음악이 흐르자마자 일시에 우르르 춤추러 플로어에 나서고 나는 덩그러니 앉아있는 경험을 종종 했다. 까베세오에 익숙해지려고 다짐했지만, 요리조리 사람들을 힐끔대는 자신을 자각하며 때로는 실소가 터졌고, 민망한 나머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게 되기도 했다.


어렵게 까베세오를 시도해서 성공했다고 느꼈는데 실상은 상대가 내 앞에 사람과 눈이 맞은 것이었던 적도 있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내 앞에 여성이 일어나 함께 플로어로 나가는 걸 보고 알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가 완전히 앞에 올 때까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서. 그러나 나만 아는 부끄러움이라해도 그것은 여전히 부끄러움인 법. 그 뒤로부터 눈길이 닿은 것이 느껴져도 종종 나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상대를 향해 묻게 된다. “나요? 나?” 돌다리도 두 번 세 번 두드려야지.


또한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강한 조명 때문에 상대의 얼굴이 잘 안 보여 까베세오가 어려웠던 적도 있지만… 인정해야겠다. 그런 물리적 불편보다는 내 성격과 맞지 않아 생긴 심리적 갈등을 더 자주 겪었다는 것을. 아무래도 나는 까베세오를 답답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가끔 까베세오가 너무 은근해서 눈치 채기 어렵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지레 조심하는 스스로를 자각할 때 답답해진다. 밀롱가를 나가면서 반가운 얼굴이 보여 인사했다가 “오늘 바쁘시던데요? ‘까베’하기 어렵네요. 계속 쳐다봤는데.”라는 말을 들으면 아쉽고 놀랍다. 혹시라도 까베세오로 오해할까봐 시선을 이동할 때 천장을 보며 이동하거나 땅바닥을 바라볼 때는 이러려고 탱고 했나 싶고 허탈해진다.


마치 이런 모습...


때로는 춤추고 싶은 사람에게 정중히 다가가 손 내밀며 “Would you…?”라고 춤을 신청하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그러면 안 된다고 기강 잡는 글이 주기적으로 페이스북에 올라온다. 상호 민망하고 불편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말로 하면 신청 받은 사람이 거절하기 어려워 마지못해 춤추러 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추는 춤이 서로에게 즐거울 리 없다는 것이다. 신청하는 입장에서도 직접 거절의 말을 듣는 것보다 눈짓으로 회피하는 간접적인 방식이 덜 아프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역병 환자 대하듯 피하며 눈도 안 마주치면 그게 더 상처가 되지 않나? 우리는 서로 대화 가능한 한국인이고 다 큰 성인인데, 싫으면 말로 잘 풀어 거절할 수 있고, 거절 받는 입장에서도 아쉽지만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지 않나? 부족한 소통에서 오는 눈치 보기와 지레짐작 보다 탁 터놓고 충분히 말을 주고받는 게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딴다(tanda)와 꼬르띠나(cortina)

‘딴다(tanda)’ 문화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차례 또는 순서를 뜻하는 스페인어 딴다는 탱고에서 한 명의 상대와 이어서 춤을 추는 단위를 뜻하며, 대부분의 밀롱가에서는 서너 곡을 한 딴다로 묶는다.(딴다와 딴다 사이에는 플로어를 비우고 다음 딴다를 준비하라고 알리는 음악인‘꼬르띠나(cortina)'가 있다. 원래 뜻은 커튼이라고 한다.)


많은 탱고 강사나 선배들은 강조했다. 한번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한 상대와는 한 딴다 내내 같이 추는 것이 예의라고. 이 때문에 첫 곡이 시작되고, 상대와 함께 몇 걸음 걸었을 때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지만 꾹 참고 한 곡, 또 한 곡이 끝나기만을 고대하며 버틴 기억이 왕왕 있다. 괴로웠다.


여러 번 괴로움을 맛본 후 나는 신중해졌다. 다르게 말하면 보수적이거나 방어적으로 변했다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도 보다는 안전하게, ‘믿고 추는’ 상대와의 딴다를 선호하는 경향이 커졌다. 어쩌다 이뤄지는 새로운 시도는 상대의 춤추는 모습을 분석하며 지켜본 뒤 이뤄졌다. 초심을 배반한 일이었다. 초보자 때 나는 좀 더 숙련자가 되면 낯선 이- 특히 초보자-에게 관대하고 환대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오래도록 전승된 전통과 규칙에는 장점도 있을 거다. 어쩌면 까베세오는 밀롱가의 ‘쿨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 되는 것 아닐까? 어떤 사람은 밀롱가가 특별하고 고상한 분위기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너무 일상적인 소통이 분위기를 망친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좋게 말했는데도 수긍하지 않고 끈질기게 반문하거나 요청하는 상대를 상상하면 애초에 말을 안 섞는 게 더 산뜻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떠오른다. 그리고 딴다의 경우, 같은 파트너와 여러 곡 춤추며 서사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춤의 깊이와 충만함을 음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그거대로 유지하고, 그런 규칙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공간 또한 신설하는 편은 어떨까? 선택지가 많아지면 좋은 거니까. 다양성이 확보된 생태계가 더 건강한 법이니까.


- 반항이 체질

마침 공간 운영에도 참여하게 됐겠다, 그곳에서 새로운 행사를 기획해서 운영해보기로 했다.‘111밀롱가’가 그것이다. 매월 첫 번째 일요일, 11000원의 입장료. 꼬르띠나 없이 1곡씩 추며, 손과 말로 춤을 신청해도 괜찮은 밀롱가. 


이 곳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이나 초보자들에게도 열린 태도로 춤을 신청하고 함께 즐거울 수 있다. 상대가 좀 불편한 사람이라도 괜찮다. 한 곡만 추고 들어가면 되니까. 만약 한 번 춘 사람이 손 내밀며 또 신청을 하고, 나는 더 같이 추고 싶지 않다? “아까 한 곡 췄잖아요?”라고 말하며 거절할 것이다.


문득 독립 매거진을 만들며 사회에 본격적으로 첫 발을 내딛은 기억이 떠오른다. 필요한 존재이지만 아직 이 사회에 없거나 충분치 않은 것. 나는 내가 그렇다고 믿는 것을 실재하게 만드는 활동을 좋아하나 보다.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이 곁들어지면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것 같고. 하지만 그렇게 창간한 <월간잉여>는 시대가 변해 존재의의가 크지 않다고 느껴지자 의욕이 팍 꺾여 무기한 휴간을 하게 됐고… ‘111밀롱가’에 대한 의욕도 시대가 바뀌면 훅 가버릴 수 있겠지.


그러니까 있을 때 놀러 오시라. 



저녁 여섯 시, 밀롱가 전 입문자를 위한 강습도 진행되니 탱고가 처음이어도 마음 편히 방문하시라. 다음은 내가 읽고 감동 받았던 참가자의 후기이다.




매월 첫째 주 일요일, 월드컵북로 6길42 지하 1층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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