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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 Jan 03. 2018

손안에냐 손 안에냐, 그것이 문제로다

누구도 모르지만, 아무도 모르지는 않는 홍보 카피의 디테일에 대하여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이다.

그는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은는이가의 주격 조사가 주어진 한국어 세계에서

은는이가는 때로는 하늘과 땅의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한 끗 차이가 디테일을 만드는 카피도 마찬가지다.


오늘 아침, 디자이너분에게서 슬랙 메시지가 왔다.

"<3D 프린터를 내 손안에> 가 맞나요? <3D 프린터를 내 손 안에>가 맞나요?"

우리 회사의 3D 프린터 리모트 컨트롤러 웨글(Waggle)의 카피였다.

홈페이지를 정리하다가 문구가 조금 이상해 보여 나에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웨글, 3D 프린터를 내 손안에


"손 안에"가 맞다고 대답하고 혹시나 싶어 다시 찾아보니 "손안에"와 "손 안에" 둘 다 맞았다.


바쁜 디자이너분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좀 더 고민해보고10분 뒤에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소비자에게 다가갈 언어의 감각을 결정할 10분, 최고로 집중해서 정보를 찾기로 했다.


카피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부터 들어갔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손 안에"에 대한 설명은 없었고, "손안"이라는 복합어에 대한 설명만 있었다.

손안이 수중(手中)의 뜻으로 쓰인다는 정의가 명확했다. 

그런데 예시 문장이 어쩐지 부정적인 느낌이다.

관용구도 손안에와 붙는 동사가 넣다, 주무르다라니.

손안에 = 손아귀에 라고 등치한 것도 손아귀에서 오는 느낌이 어색했다.


우리말샘도 찾아본다.

"손 안에" 대신 "손안에"라는 결과만 나온다.

"손 안에 넣다"가 완전히 자기 소유로 만들거나, 자기 통제 아래에 두다라는 뜻으로, 어쩐지 통제가 강조된 느낌이다.


"손안에"가 부정적이기만 한 느낌인가? 싶다가

몇 해 전 컨설팅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서울시의 "내 손안에 서울" 생각이 난다. 

(URL이 mediahub로 시작하는데, 컨설팅 당시 서울시의 '미디어 허브'를 통합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때의 URL을 그대로 가져간 듯하다)


"손안에"와 "손 안에"로 구글 뉴스 검색을 해본다.

기자는 무엇을 더 많이 썼을까?

"손안에" - 84,200건

"손 안에" - 7,700건

"손안에"의 압승이다.


마지막으로, 맞춤법의 영원한 친구 부산대학교의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를 찾아본다. 

"손 안에"를 썼더니 "손안에"를 제안한다.

손바닥 안의 공간을 뜻한다면 "손 안"

수중, 자기가 세력을 부릴 수 있는 범위를 뜻한다면 "손안"

명쾌하다.


웨글은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크기이기는 하지만, 기기와 앱이 모두 포함된 개념이다.

웨글을 3D 프린터에 꽂으면 앱을 통해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고, 친구와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며, 실시간 모니터링도 할 수 있다. 앱의 클라우드를 통해 3D 모델 파일을 슬라이싱하고, 3D 프린터로 바로 전송해 프린트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웨글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의 자유를 준다는 점에서 "손안"이 맞겠다는 결론!


10분 뒤, 디자이너분에게 메시지를 드렸다.

"손바닥 안에 웨글이 들어가서 '손 안'도 맞긴 하지만, 웨글 앱도 있고, 원격제어의 뜻도 있고 하니 '손안에'로 하겠습니다."


"넵"이라고 돌아온 대답이 경쾌하다.

이렇게 웨글의 카피는 "3D 프린터를 내 손안에" 결정되었다.



말과 글의 감각이 온전히 내 손안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이루기 어려운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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