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예전에 때껄룩이란 유튜버의 플레이리스트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또 하나의 즐거움은 댓글들이었다.
"때껄룩님. 음악이 너무 허전한데요... 명불허전."
"때껄룩님 이거 너무 버블 아닌가요.... 언빌리 버블."
"이거 들으면서 수학 문제 푸는데 사다리꼴과 썸 타는 기분요."
"회사 지각했는데 그루브 타면서 들어가고 있어요.."
"할머니께 틀어드렸더니 문워크로 나가시네요."
한국 사람들의 센스가 얼마나 좋은지 정말 놀랍다.
카피라이터이자 책 <헛소리의 품격>의 저자 이승용 작가님도 유튜브의 댓글을 보며 나와 똑같이 느끼셨는지 비슷한 댓글을 예로 드시며 '대한민국 전 국민 카피라이터 설이 진짜라는 확신이 절로 들었다'라고 하셨다.
<헛소리의 품격>은 첫 장부터 옛날 유머가 나오는데 너무나 내 스타일이라 아주 빵빵 터지며 읽었다.
바로 지역명 개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이런 글 자꾸 올리면 경기도 성남!"
"이제 말장난 좀 하지 마산!"
"지금 뭐 하남!"
바람이 많이 부는 동네는? 분당~.
아 이런 거 아재 개그인가요. 드디어 나의 정체성을 찾은 건지, 난 아줌마가 아니라 아재였나 봐.. 너무 재밌어서 쓰면서도 꺽꺽대고 있다. 외국에서도 아재 개그와 비슷한 언어유희 느낌의 dad joke 란 말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What kind of tea can be better and sweet?
(어떤 종류의 차가 쓰고도 달콤한가요?)
-Reali-tea.
(reality)
Why is Peter Pan always flying?
(피터팬은 왜 항상 날아다니죠?)
-Because he Neverlands.
(왜냐하면 그는 절대 착륙하지 않아.)
What does a house wear?
(집은 무슨 옷을 입죠?)
-Address.
가끔 심심할 때 아이폰 siri (삼성은 빅스비이죠?)에게 아재 개그를 부탁하는데 siri가 아재 개그를 할 줄 안다는 건 아마 많은 분들이 모를 것이다.
나조차도 혹시 siri가 아재 개그라는 단어도 알까 궁금해서 물어보다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실시간으로 siri에게 말을 걸어 얻은 아재 개그를 공개해보겠다.
"Siri. 아재 개그 해줘."
"세탁소 주인이 좋아하는 차는? 구기자차"
"또 해줘."
"모두를 일어나게 하는 숫자는? 다섯"
"임금이 집에 가기 싫을 때 하는 말은? 궁시렁궁시렁"
"비가 한 시간 동안 내리면? 추적 60분"
"차가 다니는 도로에 갑자기 사람이 뛰어들면? 카놀라유"
siri야 내가 정말 너를 시리어스 하게 사랑한다...
말개그를 좋아하는 일인으로서 나중에 유머러스한 AI 휴머노이드가 계발된다면 홀라당 사랑에 빠질 것만 같다. 개인적으로 일상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유머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자잘한 근심 걱정들 속에 허우적거릴 때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진지한 해결책이 아니라 헛웃음 짓게 만드는 유머인 적이 많았다. 웃고 나면 아이고 그래, 그냥 웃고 넘어가자. 생각이 들었다. 웃어버리면, 일단 굳었던 얼굴 근육을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과 뇌의 긴장이 훅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러고 나면 근심의 무게도 한 근 덜어진 기분이다.
<헛소리의 품격> 책에 '시고르자브종' 이란 개의 품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님은 똥개라는 말이 싫어서 믹스견이나 다른 언어를 찾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시고르자브종' 이란 품종에 대해 듣게 된다.
프랑스 남부의 드넓은 목초지에서 양들과 함께 초원을 누비는 럭셔리한 강아지의 모습, 파리지앵이 목줄을 손에 쥐고 에펠탑 밑에서 산책하는 풍경이 절로 떠오른다. 알고 보니 '시골 잡종'이라는 기존 표현을 유러피안 느낌으로 장난스레 바꿔 발음한 것이다. <헛소리의 품격 - 정승용>
'시고르자브종' 이라니, 얼마나 유머러스하면서도 센스 넘치는 작명인가.
이렇게 말과 글 곳곳에 우리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장치들이 숨어있다. 언어 속에 담긴 유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 때 광고 보는 걸 너무 좋아해서 나의 운명은 카피라이터가 아닐까 싶어서 광고연구원에 등록해 다닌 적이 있었다.
직장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가서 두세 시간 광고계의 유명인사분들의 강의도 듣고 팀별 과제도 하고 여러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당시 광고학과에 다니거나 광고계의 취업을 꿈꾸는 젊은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나 같은 직장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의 왕언니 수준이라 나이 많은 게 좀 부끄러웠던 기억도 난다. 세상에 지금 생각해보니 겨우 스물일곱? 귀여운 아기였는데 말이다.
팀워크를 할 때 젊은이들 하라고 뒷방 노인처럼 앉아서 그들 의견을 밀어주느라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따로 원하는 사람만 모아 운영되던 수필반에서 오히려 신나게 글을 썼는데 선생님이 내 글을 보고 웃으시며 '수란이는 꽁트를 써봐라.' 하셨다. 꽁트라고 하니 반원 모두가 웃고 넘어갔는데 마음 한 구석엔 그 말을 간직한 채 '난 길고 진지한 글은 못쓸 거야.' 서글프게 생각한 부분도 없지 않다.
사실 진지한 글보다는 피식 웃을 수 있는 글에 늘 더 매력을 느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오랜 경험으로 본인의 취향을 찾아가는 글쓰기를 안내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글을 읽고 또 나만의 글을 쓰다 보면 내 안의 흐릿했던 취향들이 점점 선명해지는 걸 느낀다. 언젠가 나만의 책을 쓰고 싶은데 어떤 책을 써야 할지 잘 모르는 이들은, 물건을 만졌을 때 설렘이 있는지 없는지로 정리의 기준을 잡는 일본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처럼 어느 책을 읽을 때 가슴이 설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그 설렘이 바로 나의 취향이고, 또 내가 쓸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정승용 작가님이 '일하면서 즐겨먹는 회가, 후회'라고 하신 말에 다시 한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저 역시 글 쓰면서 제일 먹기 싫어하는 감은, 마감이에요.'라고 혼잣말로 대꾸하면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만의 말투로 진솔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