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엄마, 나 길거리 캐스팅되면 어쩌죠."
초등 6학년 아들의 진지한 목소리에 순간 너무 웃겨서 그만 운전대를 놓칠 뻔했다.
요즘 아이랑 같이 드라마를 보는데 잘생긴 남자 주인공을 보며
"저런 애는 지나가다도 길거리 캐스팅되겠다."라고 한 말을 기억한 모양이다.
아직 또래보다 키도 작고, 엄마의 눈으로 봐도 몸매가 츄파춥스 비율인데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거울 속 내 모습이 여전히 멋져 보이는 아름다운 나이구나.
하긴 나도 저 나이 때는 내 머리숱이 남들보다 세 배는 많다는 걸 전혀 몰랐다.
엄마가 꽁꽁 묶어 땋아 준 머리가 웬만한 줄다리기 밧줄 저리 가라였다는 것도,
맞는 특대형 머리핀을 찾기 위해 엄마가 발품을 많이 팔으셨다는 것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길고 두꺼운 돼지털 내 머리를 보며 삼단같이 고운 라푼젤 같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거울 속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던 신비로운 그 나이.
사춘기에 접어들며 외모에 불만이 쌓이고, 특히 모자를 써야만 가라앉는 붕붕 뜨는 머리털에 툴툴대기 시작하던 어느 날, 엄마는 조용히 내 손을 이끌고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 자원봉사를 가셨다.
별다른 저항 없이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간 기억이 난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어서 누워만 계셔야 하는 분들과 하루 종일 보내고 나서 그 뒤로 나는 더 이상 투덜대지 않았다고 엄마는 기억하신다.
본인의 훌륭한 양육법이었음을 강조하면서.
하지만 내 기억은 다르다. 나이에 비해 너무나 맑은 눈망울을 하고 계신 그분들을 보며 내가 참 행복한 거구나, 감사해야겠다는 맘을 가졌으면 참 좋으련만, 그냥 좀 무서웠고 얼굴은 어른인 그분들이 아기같이 너무 순수해 보여서 혼란스러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
불만은 사라졌나? 아니 전혀다. 그 뒤로도 쭈욱 이어져 마흔 넘은 지금까지 툴툴대며 선글라스로 머리털을 눌러가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걸 엄마가 알면 놀라실까.
양육자의 의도대로 아이들은 자라지 않는다.
어찌 보면 아쉽지만,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 하다.
머리털 개수가 모두 다르듯 아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모습으로 자라난다.( 오늘은 털이 키워드.)
십 년 넘게 엄마의 자리에 있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 하나는, 그저 아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자 열심히 살면서 따가운 레이저 광선을 거두고 따스한 관심의 눈빛을 한 번씩 보내주는 것.
(물론 말이 쉽다... 내 아이들은 매일 레이저 광선 전신욕 중이다.)
얼마 전, 이근후 작가님의 책을 다시 필사하며 나와 같은 생각에 무릎을 탁 쳤다.
좋은 부모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양육자로서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일만 피해도,
그리고 그 남은 에너지로 자기 인생을 사는 데 열중하면
괜찮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작가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머잖아 큰 아이는 사춘기의 문턱을 넘어설 것이다.
그때는 거울 속 본인의 모습이 지금처럼 멋져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아이와 그저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뜬금없이 손잡고 아~무 효과 없는 자원봉사를 갈지도 모른다.
훗날 아이가 깨닫길 바란다.
우리가 그 시절에도 손을 잡고 다닐 만큼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는 무심한 듯 몰래몰래 따스한 관심의 눈빛으로 너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