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 아빠 내일 제주도 간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람. 아빠는 서울에서 큰 수술을 마치신 뒤 경기도의 요양 병원에서 한 달 좀 넘게 지내고 계셨다. 엄마도 보호자로 같이 계셨는데 일정대로라면 다음 검사일인 한 달 뒤까지 더 계셔야 하는데 말이다.
"아니 아빠 왜?"
"아이고 답답해서 몬 있거따. "
"그럼 비행기 표랑 다 알아봐야지."
"이미 다 끊었제!"
"어떻게?"
껄껄껄 수화기 너머로 78세 노인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야기인즉슨 요양 병원의 모든 프로그램에 적응 잘하는 사교성이 갑인 오마니와는 다르게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시는 아빠는 몸이 쑤셨나 보다. 한 달 동안이야 통증도 심하고 옆에 의사가 있으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셨는데 이제 몸도 많이 회복되시니 맘 편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거다.
오마니 오여사님은 아빠와는 반대다. 아침 요가와 스트레칭부터 건강 강의, 하루 세 끼 건강한 식사, 또 옆방 사람들과의 깨가 쏟아지는 수다를 포기하려니 너무 아쉬우시다.
" 딱 한 달만 더 있으면 좋겠구먼 느그 아빠는 빨리 가자고 난리다 난리."
그렇지. 집에 돌아가는 순간, 오여사님은 온갖 밀린 집안일부터 건강을 회복하셔야 하는 아빠를 위해 예전보다 더 신경 써서 삼 시 세 끼 건강식을 차려내야 하니 머리가 아프실 것이다.
"아니 근데 어떻게 비행기표를 끊었대? 전화로?"
"아 내가 해부렀제! 인터넷으로!"
딸 셋이 모두 해외에 있는터라 제주에서 ‘육지’로 나올 일이 있을 때마다 (제주에서는 비행기 타고 나올 때 '육지에 간다'는 재밌는 표현을 쓴다.) 전화로 부탁하기도 미안했는데 요양원의 어느 분이 하나투어 사이트로 들어가면 된다고 말해주셨다는 것이다. 아마 그분도 나이가 많은 분이 아니셨을까 싶다. 아빠는 하나투어라는 말 하나만 기억하시고 요양병원 방 한 구석에서 몇 시간에 걸쳐 인터넷으로 온갖 검색과 수십 번의 시도를 하신 끝에 성공하신 거다.
문득 내용은 다르지만, 책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 노인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 벌써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 1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아래 화단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 곡예에 가까운 동작으로 그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사실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니, 이날 알란은 백 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제할 때 본인 인증 어쩌고 웜마 뭐가 그리 복잡하다냐. 19800원에 딱 끊었는디 너마 재밌어서 그다음 날 또 들어갔더니 5만 얼마가 돼부렀시야. 껄껄껄."
아빠의 목소리에는 내가 싸게 산 물건이 세일이 끝나 정가로 돌아갔을 때의 황홀감과 행복감이 잔뜩 묻어 나왔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공항 가시기엔 아직 무리일 텐데, 했더니 그라제~ 콜택시도 예약했제~. 하시며 할 일 다 해놓고 두 다리 뻗으신 듯한 목소리셨다. 그렇게 아빠는 툴툴거리는 오여사님과 콜택시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드디어 두 달만에 제주 집으로 돌아오셨다.
저녁에 영상 통화를 하는데 환자복을 입지 않은 아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살은 예전보다 많이 빠지셨지만, 소파와 한 몸이 되셔서 모로 누우신 채로 행복하게 손주들과 통화를 하시는 모습을 보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신 것 같아 맘이 놓였다.
“아빠 집에 오니까 좋아? 뭐했어?”
“화분 물부터 줬제~.”
“엄마는?”
“밭에 갔제~.”
오마니는 그렇게 집에 가기 싫다 하시더니 집에 도착하시자마자 아빠와 함께 무거운 화분들을 날라서 물을 주시고, 냉장고를 살피시고 잠시 한국에 나와 집에 들렀던 세 딸들에게 그렇게 뜯어먹으라 해도 한 장도 안 뜯어먹은 상추와 오이, 쌈채소들이 무성하게 뒤덮였을 텃밭으로 뛰어가신 것이다.
나 역시 호텔에서 자가 격리하는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몸은 편해도 마음은 어딘가 불편했던 기간을 겪어봐서 왜 더 계시지 그랬느냐고 아빠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다. 78세 노인이 건강하셨을 때도 시도하기 어려웠던 온라인 결제를 방구석에서 몇 시간 동안 연구하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숨만 쉬고 있어도 공기가 다르고 맘이 편안한, 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돌보고 애정을 쏟은 내 공간에 대한 강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모든 이들의 입에서 그래, 내 집이 제일 편하고 좋다 라는 말이 나오듯이.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인 밭에 갈 때 신는 흙이 묻은 장화,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기 딱 좋은 낡은 밤색 가죽소파, 그 뒤에 걸려있는 대나무로 만든 등긁개, 30여년 전 오여사님이 형형색색 구슬을 꿰서 만든 촌스럽지만 요즘 빈티지 감성엔 힙해 보이는 티슈 통, 베란다에 널려있는 마른 나물들과 소쿠리들. 그 모든 익숙한 것들이 잘 다녀왔냐며 부모님을 반갑게 맞아주었을 것이다.
글을 쓰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니 차마 다시 눈을 감고 싶을 만큼 집안일이 널려 있지만,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물건들과 어느 것 하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이 공간에 애정이 샘솟는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 일상이라는 단어를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떠나봐야 그 진정한 가치를 더 잘 알 수 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 요즘, 집과 너무 붙어있어 자꾸 그 소중함을 잊고 산다. 지난 2년간 우리 가족의 일상을 보듬어준 이 공간과 더욱 서로 찐하게 사랑하고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