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라나라나
첫 아이를 임신하고 6개월쯤 일을 그만두었는데 아직 막달까지는 시간이 꽤 있으니 집 앞에 있던 홈플러스 문화센터에서 재봉틀 수업에 등록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차분히 손으로 하는 일을 잘하게 생겼다고 말한다. 딱히 손으로 하는 일에 끌리지 않았는데 한 두 번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제대로 안 배워서 그렇지, 배우면 숨은 재능을 찾는 거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수업은 열 명 남짓의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미싱에 바늘을 낄 줄도 모르는 초보였지만, 내 작품은 항상 제일 완성도가 높았다. 숨은 재능을 찾은 것은 아니고 놀랍게도 내 손이 제일 똥손이라서 선생님이 아예 내 옆에 상주하시고 내 작품을 샘플로 만들며 학생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늘 나를 새댁이라 부르셨는데 그 당시엔 그 단어가 정말 낯설었다. 막 결혼하고 몸은 임신해서 뒤뚱거리며 팔자걸음으로 다녀도 그 몸에 깃든 내 영혼은 아직 이십 대 아가씨였기에.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이 있었고, 시간마다 작품 하나씩 만드는데 90퍼센트는 선생님이 만들어주셔서 집에 돌아갈 땐 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때는 양문형 냉장고에 앞으로 돌출된 손잡이가 거의 대부분 있었는데, 거기에 끼는 손잡이 덮개, 쿠션, 베개, 주방장갑 등 이런 걸 위주로 만들었다. 안타까운 건 천이나 레이스를 고를 수는 없고 한 세트가 주어졌는데 내 취향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이 만들어야 했다.
약간 촌스러웠던 세트들 때문일까. 사람들은 점점 한 명씩 안 나오기 시작했고, 시간 많고 할 일 없고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살았던 나와, 나처럼 비슷한 환경에 나이는 훨씬 많아 보이는 언니만 남았다.
학생분들이 다 사라진 수업 시간은 처음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초반에는 미간에 깊이 파인 주름에 조금 기가 세 보이시던 선생님은 우리 셋만 오붓하게 남자, 더 편하고 여유 있어 보이셨고, 가끔 콧노래도 흥얼거리셨다. 여전히 내 것을 붙들고 재봉틀을 돌리시며 이제 가르치시기보다는 여러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손재주가 좋던 다른 언니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가며 눈과 손으로는 부지런히 진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럼 나는? 나는 주로 쓰레기를 치웠다. 떨어지고 엉킨 실밥들을 치웠고, 쪼가리 천들을 모으고, 잘못 박힌 박음질을 쪽가위로 뜯었다. 선생님이 양심상 남겨주신 마지막 10퍼센트의 작업을 완성하고 뿌듯해하기도 했다. 끝나고 나면 같이 홈플러스 내에서 점심 식사도 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새댁이 제일 먼저 그만둘 줄 알았어. 너무 못하고 못 알아듣더라. 그런데 끝까지 남았네. 끈기가 있어."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안 갔지만 리액션이 본능인 나는 일단 크게 웃었다.
" 얌전하니 잘하게 생겼는데 생긴 거랑 다르게 손이 전혀 야무지지가 않네. 그치?" 옆에 언니도 선생님 말을 거들었다.
하하. 이 언니마저.. 일단 또 웃은 다음 대답했다.
"아 네. 생각해보니까 고등학교 가정 시간에도 스커트 만들 때 친구가 거의 다 만들어 줬던 기억이 나네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신랑은 무슨 일 하셔?"
앞뒤 개연성 없는 질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가 사라졌고, 신랑 직업 이외의 내 대답엔 크게 신경을 쓰시지 않고 열심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두 분은 연배가 비슷했던 것 같다. 조금 사연도 있으신 것 같았고 남편에 대해, 아이들에 대해, 팍팍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나 역시 여전히 아가씨 마인드로 살아가던 시절이라 그분들 대화에 별로 신경 안 썼나 보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한참 (나 말고) 뱃속 아기가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던 때라 눈앞에 펼쳐진 음식들만 열심히 먹으며
해맑게 음 맛있어. 입이 다디달게 먹었던 기억은 난다.
무언가 사알짝 슬퍼 보였던 그분들. 웃고는 계셨지만 삶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겪은 나이에만 지을 수 있는, 자잘한 걱정과 고민거리가 얼굴에 내려앉은 기미처럼 그분들의 대화 속에 옅게 깔려있던 기억만 뿌옇게 남아있다.
이후 수업 과정에는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내가 개인적으로 사두었던 배넷저고리와 아기 이불 만드는 걸 들고 오라 하셔서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고 우리의 몇 개월 수업은 그렇게 끝이 났다. 큰 맘먹고 구입했던 미싱도 혼자 하려니 직진 박음질도 잘 기억이 안 나서 몇 년 들고만 있다가 잘 쓰실 것 같은 분에게 드림했다.
얼마 전 이십 대 여자 동생 둘에게 밥 사줄 일이 있었는데 동생들은 맛있는 음식이 나오자 사진을 찍어가며 너무 신나고 달게 먹었다. 그저 해맑게 까르르 웃는 아이들, 고민거리는 온통 남자 이야기, 진로 문제.
나는 자꾸만 그 틈에 끼어서 엄마 같은 얼굴을 하고 남자 고르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잘 생긴 게 다가 아니다. 티끌만 한 단점이 결혼 후엔 태산만큼 커지기도 한다. 우울한 것과 분위기 있는 걸 착각하면 안 돼 등등 그러다 뜬금없이 물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해?"
오마나. 묻고 나니 십몇 년 전 나를 향해 뜬금없이 물으셨던 문화 센터 선생님이 빙의하신 줄.
이젠 내 얼굴에도 옅은 걱정과 고민거리들과 자잘한 주름들이 깔려있겠지.
그리고 이 아이들 역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어쩌면 비슷한 얼굴을 할 날이 올 것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너무 기쁘지도 너무 슬프지도 않은,
삶의 무게와 책임을 아는 어른이 된 그런 표정을,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짓게 되겠지.
취업과 연애, 결혼, 출산, 돌잔치라는 단어들보다
아이 공부, 사춘기, 입시, 영양제, 퇴직, 노후, 장례식 이런 단어들이 대화에 오르내리겠지.
집에 오는 길에 문득,
삶이라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우리는 각 구간마다 비슷한 얼굴과 표정을 하고 거쳐가며
시작과 끝이 같은 그곳을 향해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캐리어 같은 내 인생,
좀 살살 다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FRAGILE이란 빨간딱지를 붙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