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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Apr 17. 2018

2018년 4월의 경주 마실 (2)

익숙한 것들 다르게 보기

첫날 황리단길 탐방을 마치고


'콩이랑'에서 맛난 저녁을 먹고 차 한 잔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라전통마사지 간판을 발견하곤 두 마사지 홀릭들의 마음은 선덕거렸다.

'신라 시대에도 마사지가 있었던가....?!' 라는 의구심은 잠시 접어두고, 원래 계획이었던 넷플릭스+막걸리 조합을 포기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고구려마사지도 가야마사지도 아닌 신라마사지의 실체를 확인하기로 했다.(실체는 골프관광객을 위한 고강도 스포츠마사지였다고 한다.)

몸이 노곤노곤해져 자정이 넘어 숙소에 들어온 우리는 밤바람에 나부끼는 풍경소리와 옆방에서 중년의 아버지를 주제로 싸우는 어느 가족의 두런거림을 뒤로 하고 잠에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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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아침.

길고양이의 울음소리와 대나무숲 바람소리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가 알람시계 대신 나를 깨웠다.

햇살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다.

한동안 쉼없이 치열하게 살다가 잠시 멈춰서 평소에는 들리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뭔가 비현실적이다. 자연 속에 파묻혀 삶에 작은 여백을 두어본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나무를 깎아 통으로 문을 만들면 편할텐데, 왜 손이 많이 들게 굳이 문창살을 만들고 창호지를 대서 문을 만들었을까? 라는 의문이 문득 든다.


문을 열어보았더니 파랗게 갠 하늘, 청초한 봄 날씨가 와락 안긴다.
장독과 널찍한 그릇과 쟁반에 꽃을 심어두셨는데 그게 너무나 내 취향저격이었다. 물건 본래의 쓰임새가 아닌 다른 맥락에서 쓰이는 재미.


영교당, 시골 할아버지의 진짜 한옥


사실 토요일은 황리단길에 남은 객실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불국사 쪽 숙소를 예약했다. 그런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황리단길 한옥이 깔끔한 숙소, 곳곳의 세련된 모던인테리어, 정갈한 조식, 감각적인 UX 라는 매력이 있다면, 이곳 영교당은 진짜배기 한옥에서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뼛속까지 한옥'이었다. 같은 한옥이면서 완전히 다른 한옥. 현대적 감각과 편리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한옥과 한옥의 모나고 불편한 부분을 그대로 보존한 한옥. 집 앞에는 밭이 펼쳐져 있고 담장너머로 까치가 호두나무와 은행나무가 서있다. 그 아래 실개천이 흐르고 집 뒤쪽에는 대나무가 빼곡히 서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은은한 소음을 만들어 준다. 벨소리가 아닌 진짜 새 지저귀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뜰 안에는 이름모를 꽃들이 점처럼 피어있다. 샷시없이 한지 바른 문을 제끼면 바로 바깥.



근사한 조식은 아니지만 갓 삶은 뜨끈한 달걀과 초코파이, 믹스커피를 내어주셨다. 주인 아저씨께서 믹스커피 봉다리로 직접 휘휘 저어 타주신 커피.
평소에는 믹스커피도, 초코파이도 안 먹지만 이런 공간에서 이런 순간에는 최고의 끼니가 된다. 초코파이에 쓰여진 한자 한 글자가 유난히 상황적 맥락에 어울린다.
커피 앤 도넛 대신 믹스커피 앤 초코파이.
안뜰에는 손수 가꾼 화단이 여럿 있고 연꽃이 그려진 기와 몇장이 슴슴히 놓여져 있다.
내가 고양이라면 하루종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물고기 풍경. 바람이 불면 대나무숲이 푸른 파도처럼 넘실대는데, 그 위를 헤엄치는 것만 같다.
뒤뜰은 어이가 없는 맷돌로 꾸며놓으셨다. 어이가 없는 맷돌을 이렇게 활용한다는 점에서 한 번 더 심쿵.
집 앞 실개천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던 맹냥이.
나갈 준비.
대나무숲에 바람 지나가는 쏴아아 하는 소리가 파도치는 소리 같았다.
석굴암 가는 길에 발견한 벚나무. 벚꽃이 지면 아쉬워 하지만, 실은 벚꽃이 진 후의 벚나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얗고 풍성한 벚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불국사 앞 한옥카페 메이플

카페 메이플. 불국사 앞에 이렇게 감각적인 카페가 있어서 놀랐다.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국내여행을 다닐 수 있도록 지방소도시에 이런 가게들이 더 많아졌음 하는 마음. 온라인 서비스든 오프라인 비즈니스든,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기회가 있다.

이번 신제품 바나나선식을 들고.
왕벚나무보다 개화시기가 2주 늦어 운좋게 개화 피크시기에 보게 된 왕겹벚꽃
13년만에 만난 다보탑
그리고 석가탑

너무 어렸을때 왔다가 성인이 되고는 처음 와서 그랬는지, 내 기억속의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보다는 작아진 기분. 그때는 내가 작아서 더 커보였을지도.

소원 비는 돌탑

외계인이 어딘가에서 인간을 관찰한다면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를 두며 염원을 하는 인간의 특성을 신기해 할 것 같다. 이런 행태는 어쩌면 종교의 기원일지도. 현세에 대한 불안감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종교 역시 생존본능의 연장선 상에 있는 행위로 봐야 하나?


불국사에서 나오던 길에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인적 드문 숲길이 있어 괜히 한장 찍어 봤다. 북적이는 랜드마크보다 그냥 이런 스팟이 더 좋다.
초우가에서 한우육회 한 그릇
첨성대 옆 유채꽃

경주의 4월 중순은 왕겹벚꽃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기다. 벚꽃에게는 너무 늦고, 유채꽃에게는 너무 이른 시기. 유채꽃은 5월에 핀다기에 마음을 접고 첨성대를 찾아갔는데, 비록 키가 작고 듬성듬성 나긴 했어도 노란 유채꽃밭이 반겨준다.



내 기억 속의 유채꽃은 더 키가 크고 꽃잎이 주름지처럼 빳빳하고 파삭거리는 노란 꽃이었는데, (그럼 그 꽃은 뭐였을까?) 이게 유채꽃이 맞나? 싶어 유채꽃을 검색해봤다. 유채꽃의 유가 기름 유라는 사실과, 유채꽃을 개량해 얻은 기름이 카놀라유라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유채꽃은 배추와 양배추의 자연교잡종이라는 사실에 또 놀랐다.

연을 날려본다.

유채꽃도 연 날리기도 정말 오랜만에 해봤다. 연관된 어릴 적 기억들이 불연속적으로 떠올랐다. 아빠가 날려주던 연, 항상 어렵기만 했던 연 띄우기, 초등학생 때 불국사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12년 제주도의 유채꽃, 11년 답사에서의 청송대, 05년 수학여행 경주의 유채꽃, 빽빽하게 너른 벌판을 채운 유채꽃밭 길 사이로 찍었던 단체사진.


18년 29살이 된 나에게 경주는 익숙하고도 낯선,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살면서 최소 4번 이상은 왔을텐데 구체적인 기억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단편적인 장면이 사진처럼 머리에 저장되어 있다. 내가 다시 경주에 왔을 때는 이번 여행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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