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화위복 Feb 10. 2022

[직장생활] 사내 익명 게시판이 확대된 이유

내부 인트라넷을 운영하는 회사들은 대부분 익명 게시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소통창구로 회사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들이 오고가거나, 회사 밖의 이슈들에 대해서 열띤 토론이나 팁 공유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순기능은 회사 내에서 부조리가 발생했을 경우 직원들이 신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입니다. '블라인드'를 통해 몇몇 회사들의 부조리가 사외로 고발되었듯, 익명 게시판은 회사 내에서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한 조심스러운 실제 회사생활과는 다르게 직급, 나이와 무관한 익명성 특유의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가 특징이기 때문에, 많은 직원들에게 근무 시간 도중 틈틈히 익명 게시판을 둘러보는 것은 삭막한 회사생활 속의 소소한 재미입니다.



직장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익명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사내 인트라넷의 인터페이스를 개편하면서 숨겨져 있던 익명 게시판이 메인 화면으로 나왔습니다. 과거엔 최신 게시글을 읽으려면 인트라넷 로그인 후 익명 게시판으로 직접 진입해야 했는데, 이젠 로그인만 하면 바로 메인화면에서 최신 글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접근성이 크게 좋아진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엔 익명 게시판을 이용하지 않았던 직원들도 자연스럽게 유입되어 익명 게시판의 규모가 저절로 확대되었습니다. 회사에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익명 게시판의 '여론 화력'도 덩달아 상승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왜 회사는 '굳이' 익명 게시판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을 선택했을까요? 회사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고, 최대 이윤 추구를 위해선 직원들이 외부요인에 흔들리지 않고 근무시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이 통념입니다. 익명 게시판 특유의 자극적인 내용들은 직원들의 근무 집중력을 흗뜨리게 합니다. 또한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안 좋은 여론이 있으면 익명 게시판을 타고 급속도로 번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익명 게시판을 확대한 것이 개인적인 의문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최근에는 그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많은 매체들에서 'MZ세대'의 특징을 거론할 때, 윗 세대들과는 다르게 '할 말은 하고 사는' 세대라고 언급합니다. 하지만 전체 세대 구성원 중 '할 말은 하고 사는' 사람들의 비중이 다른 세대보다 높을지는 몰라도, 회사 생활을 충실히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회사에 제 목소리를 내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익명 게시판은 특히 낮은 연차의 젊은 사원들에겐 강력한 유혹입니다. 실생활에서는 대놓고 말하기 힘든 불만의 상황도 익명 게시판에서는 마음껏 표출할 수 있습니다. 익명 게시판에 복받쳤던 마음을 힘차게 토해내고, 댓글로 많은 지지를 받고 나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익명 게시판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 입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회사에 제 목소리를 내는 건 여전히 힘들다 (출처 : 트렌드모니터)





직원들이 진정으로 회사에 심각한 불만사항이 있고, 그것이 바뀌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실제 '이슈화'되어야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하게 파업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이고, 강성 노조들을 생각하면 회사와 소비자를 좀먹는 악의 축의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강성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근로자의 입장에선 실제로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행동'없이 익명 게시판의 여론만으로는 불만사항에 대한 회사의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익명 게시판은 이러한 직원들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면서 실제 '행동'에 대한 욕구를 오히려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가지는 퇴근 후 소주 한잔과 같은 역할입니다. 친구들과 만나 소주 한잔 하면서 여러가지 불만을 마음껏 토해내면, 속이 시원하고 묵은 감정이 조금은 풀립니다. 그 풀린 감정이 다음 날 아침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정상 출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다만, 속은 시원할 지언정 실제 숨막히는 회사 생활에서 바뀐 것은 없습니다. 근무시간에 익명 게시판을 통해 마음껏 불만을 표출하고 회사를 비꼰 뒤에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린 후 집으로 퇴근하면 회사에 대한 불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정도 사그라듭니다. 선거철만 되면 온라인 여론과 실제 선거 결과가 딴판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익명 게시판이 아무리 뜨거워도 실제 오프라인의 회사는 매우 평온합니다.




또한 회사의 이런저런 여론에 관심 없는 사람에겐 피로감을 증대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특히 제 개인적으로는 예전엔 익명 게시판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회사에 불만이 있을 때, 기가 막히게 잘 풍자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웃기기도 하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변화는 없는데 매번 비슷한 내용의 글들만 올라오다보니, 주변에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피하게 되듯이, 오히려 글을 안 읽게 되고 회사 내부의 이슈들에 대해 점차 무관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와 비슷한 많은 중도층 혹은 관망층들의 무관심화도 회사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결과일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삼국(三國)을 봤습니다 -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