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를 통해 95부작 대작 드라마 『삼국』의 정주행을 얼마 전에 완료 했습니다. 이 드라마는 중국과 한국의 삼국지 매니아들 사이에서 『삼국』이라는 제목보다 『신삼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유는 90년대에 방영한 『84부작 삼국지』와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84부작 삼국지』를 아직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와 직접적인 비교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본 작은 2010년대에 방영한 비교적 따끈따끈한 신(新) 삼국지인 만큼 과거 삼국지 관련 작품들에 비해 많은 CG와 세련된 영상미가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본 드라마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따라 흘러가되, 본작 고유의 다양한 각색과 재해석의 비중도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설 속 이야기와 이질적인 장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작진이 드라마의 전개상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축소나 삭제되기도 했으며, 반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전개합니다.
예를 들면 삼국시대 역사 혹은 삼국지연의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황건적의 난'을 삼국시대의 시발점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광활한 중국 전토 중 무려 8개 주에서 펼쳐진 대규모 농민 반란이라는 점에서 후한 제국의 쇠퇴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 촉, 오 삼국의 창업자들인 조조, 유비, 손견의 실질적인 전국 데뷔전입니다. 특히 이미 관직에 종사 중이었던 조조와 손견과는 달리 돗자리 짜던 '촌놈'의 신분이었던 유비는 이 때의 활약을 계기로 말석이지만 관직에 들어서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헌데 이 에피소드가 통으로 생략되고 바로 동탁의 국정농단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아무런 군공도 없는 촌놈 유비가 '18로 제후'들의 모임에 초대장도 없이 급작스럽게 합류를 요청하는 장면이 다소 어처구니 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장비가 유비에게 초대장이 없으면 집으로 가라고 연거푸 말하며 나름 FM대로 열심히 일을 잘했던 수문장에게 분노하여 그를 두들겨 팼음에도, 유비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조조가 '18로 제후'로 합류를 급작스럽게 허락한 것 역시 의아하게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스토리 생략으로 인해 작 중 내내 종종 벌어지는 이러한 비약은 시청자에 따라선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후반부에 날아가는 주요 에피소드는 제갈량의 남만 정벌입니다. 남만 정벌은 실제 역사는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연의에서 부풀려져서 각색된 부분입니다. 또한 후반부 드라마의 주요한 스토리 줄기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이므로, 삭제되어도 이야기 전개상 크게 무리가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삼국지 매니아라면 어렸을 때 많이들 읽었던 『60권 만화 전략 삼국지(요코야마 미츠테루 저)』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파트 중 하나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 남만이 지금의 중국 원남성 쪽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당시 만화 삼국지에선 외지인들은 절대 살 수 없는 마치 야생 정글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남만의 척박한 환경과 남만 민족들의 기기묘묘한 모습들, 그리고 제갈량이 지혜를 총동원해서 그들을 격파해가는 장면들은 독자들에게 마치 SF영화를 보는 듯한 소소한 재미들을 줍니다. 재미적인 측면만 생각해 봤을 때, 만화처럼 세세한 묘사까지는 아니어도 소소하게나마 남만 정벌의 영상화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겐 큰 실망감을 줄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반면 기존 삼국지 관련 작품들과는 다르게 크게 확대 조명된 부분들도 있습니다. 조비의 후계 과정이나 부족한 능력에 대해 열등감이 많지만 참을 줄 아는 인내심의 성격 등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적벽대전 승리 후 유비와 손권 세력간의 형주 점유를 위한 치열한 긴장감도 다른 삼국지 관련 작품들보다 더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기존 삼국지 관련 작품들에서 유비와 손권이 대충 합의해서 갈라먹은 듯한 느낌을 주는 형주에 대해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은 흡사 실제 외교전을 방불케 합니다. 이러한 재조명들은 장자이지만 능력면에서 다소 부족한 조비가 각자 다양한 분야로 총애 받던 다른 아들들을 제치고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으며, 자신의 아버지도 차마하지 않았던 찬탈을 왜 하게 되었는지 충실한 복선이 됩니다. 또한 유비와 손권 세력의 형주 에피소드를 보면 국가의 이권이 걸린 다툼이라면 담당자들 모두가 얼마나 더 쪼잔하고 치졸해질 수 있는지 현실감 반영 100%의 느낌을 줍니다. 다만 이런 치밀한 묘사가 조금만 선을 넘어도 늘어지고 답답한 전개가 될 수 있는 드라마의 특성상 제 개인적으로는 전개가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크게 볼만한 점을 꼽자면, 인물들에 대한 재해석과 입체적인 묘사입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에서 드라마의 진 주인공은 총 4명(조조, 유비, 제갈량, 사마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조조 정도를 제외하면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제갈량, 사마의는 평면적인 이미지가 강한 편입니다. 유비는 그저 착하고 덕망있는 군주, 제갈량은 하늘에서 내린 신선, 사마의는 신선 제갈량에 대적하는 명석한 악역 정도의 이미지 입니다. 하지만 본작에서는 이들도 장점과 단점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감정을 드러낼 때는 확실하게 드러내는 등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시청자들의 감정선이 이들의 희노애락에 따라 어쩔 때는 가슴이 웅장해지기도, 어쩔 때는 미어지기도 합니다.
다만 주인공 버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주변 인물들이 다소 너프를 먹어야 했는데, 주요 인물들 중에선 말년의 관우와 장비, 적벽대전 이후의 주유, 제갈량의 북벌시 조진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각자 모시는 군주의 전략이나 대세보다는 사적인 감정으로만 움직이는 1차원적인 빌런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조진은 굴욕당하는 개그 캐릭터이기라도 하지만 관우, 장비, 주유는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 캐릭터들인지라 욕받이 전용으로 창조한 캐릭터들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좋아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선 이들의 너프는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유쾌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