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다보면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소설에서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불리는 당대의 영웅들인데, 왜 세력도 약하고 패배만 하는 유비를 형님으로 모시며 죽을 때까지 곁을 지켰을까? 희대의 기재라 불리는 제갈량은 때로는 연약하고 유유부단한 유비를 평생 은인으로 모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전쟁은 그야말로 생사가 오고가는 곳입니다. 유비의 부하들이 유비를 모시다가 전투에 패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 뿔뿔히 흩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순히 '의'와 '충'이 당시 최고의 가치였다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유비를 평생토록 따르는 이들의 행동은 어린 저에겐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유능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인재보는 눈이 하늘에 있을 것 같은 조조는 왜 여포에게도 패배한 유비를 불러 그의 어떤 점을 보고 '천하의 영웅은 나 조조와 당신 유비 뿐'이라고 치켜 세웠을까요? 도대체 유비에겐 어떠한 마성의 매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소설에서는 이것을 충분하게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것이 바로 드라마 『삼국』의 유비 입니다.
드라마 속 유비는 기본적으로 부하들과 백성들을 아낄 줄 아는 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욕심보다는 한 제국의 부흥을 먼저 생각하는 대의를 품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기본적으로 소설 속 유비와 비슷한 설정입니다. 드라마에서 유비가 헌제와 독대하여 헌제로부터 대업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을 받았을 때,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조조를 죽여 한 왕조를 일으키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에서 유비의 충심이 단순히 세력 유지를 위한 정치적 명분이 아닌 마음속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 속 유비와 드라마 속 유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유약하고 눈물이 많은 소설 속 유비와는 달리, 드라마 속 유비는 누구를 만나도 꿋꿋한 자세에 절대 기죽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불같이 화를 낼 줄 아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실무적인 부분들은 유능한 부하들에게 일임하는 인상이 강한 소설 속 유비와는 달리 제갈량을 만나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전 구멍가게 시절에는 모든 실무를 자기 손에서 처리하려는 능력적인 모습도 부각됩니다. 이것을 마냥 주인공 보정이라 보기 힘든 것이 실제 이러한 강인한 정신력과 능력치가 없는 상태에서 유비가 소설에서처럼 인덕만으로, 혹은 게임에서처럼 '매력 원툴'의 능력만으로 시골 빈털털이에서 한 나라의 황제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현재에도 성공한 창업가들의 실제 스토리들을 살펴보면, 미디어에서 극히 미화된 부분 외에 엄청난 정신력과 독한 모습들을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요. 서주에서 조조에게 대패하여 영토, 가족, 형제, 부하들을 모두 잃고 또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이제 조조와는 넘사벽의 격차가 생겨 좌절할 법도 하지만 하늘을 보며 조조와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는 드라마속 장면은 유비의 강인한 정신력을 느낄 수 있는 명장면 입니다.
유비는 생애동안 상대방의 입장에선 '뒤통수'로 불릴 만한 일들을 많이 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치고 받고 싸우기는 했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형님, 아우하며 잘 지냈던 여포가 참수당하는 데 크게 일조합니다. 여포로부터 죽기 전에 '음흉한 귀 큰 놈' 소리를 듣습니다. 또한 조조의 휘하에서 얌전히 있다가 바로 틈이 생기자 서주로 도망간 것도 조조의 입장에선 충분히 배신으로 느낄 법 합니다. 익주를 차지할 때는 명목상으로는 익주를 도우러 가는 목적으로 출병한 것이니 적어도 유장의 입장에서는 '뒤통수' 맞은 격이지요. 이처럼 겉으로는 누구와도 잘 지내지만 속으로는 절대 얌전하게 있을 생각이 없는 '음흉함'은 유비하면 빼놓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유비의 '음흉한 행동'들과 이 '음흉함'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유비만의 내적 고뇌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비는 타고난 이상주의자입니다. 특정 군주가 조조처럼 한 왕실을 대놓고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군주들과는 협력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또한 이러한 자신의 타고난 성향과 더불어, 유비는 조조에 대한 차별화 전략으로 철저하게 조조와 반대되는 행동을 해왔습니다. 자신의 이득에 방해가 된다면 주변의 평판은 개의치 않고 어제의 동료도 과감하게 적으로 만들 수 있는 조조와는 달리 유비는 한 번 맺은 협력관계는 끝까지 신의로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런 점이 잔혹한 조조와 대비하여 유비라는 인물의 차별화된 평판을 만들어준 근본이 됩니다.
하지만 난세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특히 난세는 아무런 힘도 기반도 없었던 유비에겐 더욱 잔혹합니다. 유비가 먼저 호의의 손을 건넨 여포에게 서주를 뺏겼으며, 유표에게 양위를 제안받아 손쉽게 형주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거절하여 결국 또다시 조조에게 장판파에서 강하까지 쫓기게 됩니다. 조조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지요. 따라서 유비는 이상주의자적인 본연의 자아와 난세를 살아가는 군주로서의 자아가 충돌하는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익주를 공격하기 전에 이러한 유비의 내적 고뇌가 가장 잘 드러납니다. 유비는 장로의 침공에 대비해 유장을 도우러 익주로 들어왔고, 유장에게 호의의 대접을 받으며 관계를 쌓아 나갑니다. 그러나 유비의 입장에선 익주는 대업을 위해 반드시 전략적으로 취해야 하는 땅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유비의 내적 갈등을 일으킵니다.
드라마에서는 약간의 각색을 가미하여 이러한 유비의 고뇌에 감복한 방통의 희생을 통해 유비가 진정한 난세의 군주로 각성하게 됩니다. 방통이 적이 매복해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낙봉파로 진입하여 적군의 화살에 목숨을 잃게 되고, 방통의 죽음이라는 명분을 얻은 유비는 즉각 익주를 공격하여 정복합니다. 방통의 죽음이 자신을 위한 희생임을 깨달은 유비는 더 이상 자신의 하찮은 '작은 의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난세를 살아가는 진정한 군주로 한 단계 성장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원래 시나리오 상 그런 것인지 배우의 독창적인 재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비의 표정을 보면 유비가 아끼는 인물과 사무적으로 대하는 인물을 금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이고 상황에 따라 표정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조조와는 달리,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엮인 인물들을 대할 때의 유비는 철저한 포커페이스 입니다. 속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당대 사람들이 '음흉한 놈'이라고 생각하고도 남았을 것 같을 정도로 철저하게 사무적인 표정을 유지합니다. 다만 관우, 장비, 조운 같은 심복들이나 제갈량을 볼 때는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쳐다봅니다. 평소 업무할 때는 항상 표정 변화가 없고 카리스마 넘치는 상사한테 저런 미소를 받는다면, 남자라도 그 부하의 마음은 녹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유비가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자인지 엿볼 수 있는 잔잔한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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