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여러 부문에서 같이 노미네이트된 것으로 유명한 샌 멘데스 감독의 『1917』을 봤습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참혹하며 무의미한 것인지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김없이 주인공(윌리엄 스코필드, 조지 맥케이 분)을 쫓아가는 롱테이크 연출 기법이 인상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통해 생지옥이라 묘사되었던 1차 대전 서부 전선의 참호 속 상황과 노맨스랜드(No man's land)라 불릴 정도로 아무것도 살아남을 수 없었던 대치 전선 공간의 참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연출 기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례없는 장기전으로 인해 참호속에서 피로에 절어서 무기력하게 졸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 군대를 다녀온 많은 한국 남성들이 PTSD를 느낄 것 같은 디테일함도 좋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최근의 유럽의 시국과 맞물려서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에게 치명적인 재해인지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시청한 뒤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만한 몇 가지 장면들을 추려봤습니다.
1. 독일군 조종사에게 찔린 블레이크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1,600명이 전멸할 위험에 빠진 영국군 아군(데본셔 연대 2대대)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처참한 노맨스랜드와 독일군의 참호를 넘어 한 민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곳 상공에서 독일군과 아군 전투기가 치열하게 공중전을 펼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공중전 끝에 독일 전투기 1대가 불이 붙은채로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앞으로 떨어지게 되고 두 사람은 일단 독일군 조종사를 구해주게 되지요. 이미 전투 경험이 있어 전쟁터의 생태를 잘 알고 있던 스코필드는 편하게 죽게 그냥 놔두자고 이야기 합니다. 즉석에서 독일군 조종사를 총살해도 누가 뭐라할 상황이 절대 아닐 뿐더러, 그냥 놔두면 독일군 조종사가 지나가던 독일군들에 의해 구출될 수도 있을테니 그나마 영국 군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후의 배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 경험이 없어 다소 어리버리했던 블레이크는 구해주자고 합니다. 그렇게 스코필드가 마실 물을 뜨러 간 사이 블레이크는 독일군 조종사에게 칼을 맞게되고 스코필드가 그 자리에서 독일군 조종사를 즉각 사살하게 됩니다.
독일군 조종사를 죽게 놔주자는 스코필드(좌)와 살려주자는 블레이크(우) (출처 : 넷플릭스 캡쳐)
명령을 전달하는 목표 부대인 데본셔 연대 2대대에는 블레이크의 형이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 전까지만해도 형이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죽음을 당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블레이크가 스코필드보다 더욱 동기부여된 상태로 주도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 포함 많은 관객들이 블레이크가 진주인공인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이크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을 지 예측하기 힘들었지요. 저는 독일군 조종사를 구하자는 블레이크의 말을 듣고 제 아무리 피튀기는 전쟁터라도 아군과 적군의 구별없는 인간애적인 장면이 연출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상치못한 시점에서 블레이크의 죽음을 보니 지금 이 곳은 꿈과 희망도 없는 전쟁터라는, 잠시 풀려있던 긴장감이 다시 조여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초반에 두 주인공의 역할을 바꾸어서 '설마 주인공이 여기에서 죽겠어?'라는 마음으로 잠시나마 전쟁터라는 긴장감을 풀어놓았다가, 블레이크의 죽음을 통해 다시 긴장감을 꽉 조이는 감독의 의도가 성공을 거둔 멋진 연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 이 땅을 뺏겠다고 3년을 싸웠어
독일군 조종사에게 당한 블레이크의 유품을 회수한 스코필드는 다른 영국군 부대원들과 마주쳐 잠시나마 차량으로 이동하는 도움을 받게 됩니다. 사병 트럭에서 다른 병사들과 같이 이동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됩니다. 대화 중 트럭 뒤에 펼쳐진 황폐화된 땅을 보며 한 병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을 뺏겠다고 3년을 싸웠어. 그냥 줘버릴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을 차지하기 위해 3년을 싸운 것에 허망함을 느끼는 병사들 (출처 : 넷플릭스)
1차 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전쟁이란 사명감을 가진, 전투에 숙달된 '프로 군인'들끼리 최대한 단기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권력자의 정치적 메시지가 어느정도 전달이 되면 살상을 최소화하는 적당한 선에서 양측이 결론을 냈다고 합니다. 산업혁명 이전의 재래식 형태로 수많은 군인들에게 보급을 해가며 전쟁을 하는 것이 얼마나 국력소모가 심했을지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대충 이런 사람들끼리의 싸움이었던 전쟁. 19세기 프랑스 군대(출처 : wikimedia)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무기나 보급품의 대량 생산화가 가능해지고, 교통의 발달로 전선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형태의,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총력전' 형태가 가능해졌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징병제처럼 숙달되지 않은 일반 남성들도 사지만 멀쩡하면 총을 쥐어주고 간단한 훈련을 통해 즉각 전쟁터로 투입이 가능해졌습니다. 블레이크도 사실 '밥 잘 줄 것 같아서' 입대했다고 말했을만큼, 베테랑 군인이라기 보다는 그저 전쟁 전까지만해도 보통의 청년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터의 섭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군 조종사의 기습에 당한 것입니다. 위 장면에서 트럭 끝에 터번을 쓴 인도계 병사도 있는 것으로 보면 영국의 식민지의 청년들까지 병력으로 투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인원들이 전장에 투입되니 대량 살상무기가 개발되고, 대량 살상무기로부터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양측이 서로 참호를 파고 결론이 나지 않는 지리한 장기전의 형태로 1차 대전이 펼쳐집니다.
평소에 전쟁과 큰 관련없는 일반인으로 살았다가 전선에 투입된 이후 생지옥이라 불리는 곳에서 끝나지도 않고, 끝날 것 같지도 않은 전쟁을 치른 군인들이 심정은 정말 절망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권력자들에겐 정치적인 이유로 내줄 수 없는 한치의 땅이지만, 징집된 군인들에겐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황무지일 뿐입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권력자 개인의 의지일 뿐 희생되는 것은 힘없는 병사와 민간인들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던 장면입니다.
3.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는 거지
스코필드가 빌려타고 이동하던 차량은 독일군이 끊어놓은 교량 때문에 우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시가 급한 스코필드는 다시 따로 이동할 것을 결심합니다. 그 때 스코필드에게 도움을 준 스미스 대위는 스코필드에게 행운을 빌며 만약 맥켄지 중령을 만나게 되면 '다들 보는 앞에서 명령을 전달하라'라고 조언을 해줍니다. 이것은 맥켄지 중령에게만 따로 명령을 전달하면 중령이 그 명령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전달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1,600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명령을 지휘관 한 사람이 개인적인 판단으로 무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현실감없는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스코필드가 데본셔 연대 2대대에 도착했을 때는 공격 개시의 명령이 막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스코필드가 맥켄지 중령에게 공격 중단의 명령을 전달하자 맥켄지 중령은 실제로 이 명령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변 참모진도 같이 들었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신을 읽게되고 결국 공격 중단을 지시합니다.
오늘은 끝날 거란 희망이 있었다. 희망은 위험한 것이지. 다음 주면 다른 명령이 내려올 거다. '일출과 함께 공격하라'.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은 하나 뿐이다. 마지막 한사람까지 죽는 거지.
모두가 죽어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멕켄지 중령(출처 : 넷플릭스 캡쳐)
맥켄지 중령은 왜 자신이 명령을 무시하려고 했는지 말합니다. 그 동안 정확한 상황 판단과 명령을 내리지 못한 지휘부를 비판하면서, 어차피 다 죽어야 끝날 전쟁을 굳이 일주일을 더 끌 필요가 있냐는 비관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스코필드가 영웅적으로 모든 고난을 뚫고 명령을 잘 전달하여 1,600명의 병사들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헐리우드식 해피 엔딩은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1차 대전 시기에는 전쟁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영웅적인 지휘관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대규모의 병력이 지리한 장기전을 하고, 하늘에는 이전에 없었던 전투기들이 떠다니며, 참호밖을 나가면 대량 살상무기만 기다리고 있는 환경에서 전통적인 지휘 교육을 받은 어떠한 사령관도 정확한 판단을 하기가 불가능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령부의 비합리적이면서 연속성도 부족한 명령들을 이미 절망 상태에 빠진 병사들에게 지시하는 것은 야전 지휘관 입장에서도 엄청난 좌절이었을 것입니다.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도착한 스코필드에 대한 환영이 아닌 짜증을 내었던 맥켄지 중령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