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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화위복 May 29. 2022

박찬욱 감독의 전작 『아가씨』를 봤습니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박찬욱 감독이 신작 『헤어질 결심』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우연찮게도 최근에 OTT에서 박찬욱 감독의 바로 이전작인 『아가씨』(2016)를 봤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에 대해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고자 합니다.




- 좋았던 점 




이 영화는 2016년 칸 영화제 '벌칸상' 수상작답게 아름다운 영상미가 탁월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이며 주요 무대는 주인공 이즈미 히데코(김민희)의 거대한 저택입니다. 일본식과 영국식이 혼합된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건축물은 시종일관 음산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디테일한 소품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오롯이 배경에 몰입할 수 있는 감각을 제공합니다. 집안의 전체적인 색조는 블루톤으로 히데코의 차가운 감성이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색감과 디테일한 소품으로 시대적 배경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히데코의 입체적인 캐릭터도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실질적으로 '히데코의, 히데코에 의한, 히데코를 위한' 영화라 평가합니다. 히데코는 이모부 코우즈키 노리아키(조진웅)의 억압으로 세상과 차단된 상태에서 저택에 갇혀 지냅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히데코는 세상 물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여성인 듯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자신의 에너지와 영리함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일본인 히데코는 조선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5세부터 조선 땅에 살았다는 배경이 있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조선 사회와 단절된 상태에서 저택에서만 살았던 히데코가 조선어를 잘 할 만한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단순히 한국인 관객들을 위해 극을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한 장치인 듯 했던 히데코의 유창한 조선어의 이유는 극 중반에 묘사됩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조선어로 뒷담을 하던 조선 하녀들을 응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목적이나 환경으로 봤을 때 필사적으로 독학으로 깨우쳤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으로부터 히데코는 의외로 독한 성격에 타고난 추진력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이모부의 억압에 갇혀서 발휘되지 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숙희와 사랑에 빠지자마자 속전속결로 탈출을 결심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줄 방아쇠가 필요했을 뿐이지 이미 히데코는 답답하고 억압된 삶을 끝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후지와라 백작(하정우), 숙희와 도망쳐 나온 뒤 백작과 결혼식을 올리고 임시로 거처하던 절에서 뜬금없이 숙희에게 미친듯이 키스를 퍼붓는 장면이 있습니다. 백작을 등쳐먹는다는 계획이 예상보다 진척이 느리자 폭발하는 불안감을 표출하는 장면으로 보입니다. 극 중반부터는 주도 면밀하고 영리한 면만 부각되었던 히데코의 또 다른 면모인 인간적인 순수함을 다시 상기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백작을 떨어뜨려내고 숙희와 재회하기 위해 히데코는 아편을 탄 술을 들고 백작의 방을 찾아갑니다. 백작이 끝끝내 술을 마시지 않자 술을 자신의 입에 머금은 뒤 백작을 유혹하여 입에서 입으로 술을 전달하는 장면은 그녀의 순간적인 재치와 임기응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보여준 놀라운 행동들의 동기는 단 하나, 비즈니스나 이해 타산 때문이 아니라 숙희와의 사랑의 결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기꾼을 이겨먹는 등 대담한 행동들을 실행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순수한 목적 앞에서는 누구보다 진심인 인물입니다.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역대급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꼈습니다.




- 아쉬웠던 점



시종일관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한 번의 큰 반전이 있으며, 두 여성 주인공이 난관들을 이겨내고 우여곡절 끝에 사랑의 결실을 이뤄내는 스토리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줄기상 필수적인 팽팽한 긴장감의 부재가 아쉽습니다. 히데코가 숙희에게 '내가 진짜 백작과 결혼하기를 바래?'라고 묻자 숙희가 그렇다고 답변합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준 숙희에게 버림 받았음을 느낀 히데코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이를 눈치챈 숙희가 재빨리 구해내며 용서를 구합니다. 이후 히데코는 자신도 백작과 짜고 역으로 숙희를 정신병원에 감금하려 했음을 고백하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작을 등쳐먹기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합니다. 즉 히데코의 자살 시도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 시도 전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된 감정선이 희미하다 보니 이 장면까지도 백작을 등쳐먹으려는 계획이 서로에 대한 사랑 때문인건지, 아니면 서로에 대한 동정으로 유발된 비즈니스 적인 계획인 건지(히데코는 자유를, 숙희는 금전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다소 의아했습니다. 숙희가 히데코를 보자마자 '예쁘다'라고 생각하며 한 눈에 반한 것이 암시된 점, 두 사람의 농도 짙은 격렬한 베드씬, 그리고 백작과 히데코가 가까워질수록 표출된 숙희의 질투심 등이 있었지만 몸의 정을 나눈 주인과 하녀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는 둘 만의 감정 교감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입니다. 




히데코의 자살을 막는 숙희. 이 때까지도 숙희의 히데코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동정 때문인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출처 : 쿠팡플레이 캡쳐)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 장면 이후로 극은 뻔한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마치 한 번 들어가면 평생 썩어야 할 곳 처럼 묘사되는 정신병원에서 숙희는 화재소동이 일어나자 너무나도 간단하게 탈출해 냅니다. 두 주인공의 마지막 위기라고 할 수 있는, 백작이 히데코가 주는 아편 섞인 술은 입에 대지도 않은 채 히데코를 강간하려는 장면에서도 히데코의 계획이 실패할 수 있겠다는 긴장감이나 불안감이 딱히 느껴지지 않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술을 전달한 히데코의 임기응변이 돋보였을 뿐 극의 흐름상 어떻게든 히데코가 계획에 성공해 탈출할 것 같은 '당연한'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긴장감 약화의 원인으로는 뭔가 더 깊은 구석이 있어보였던 두 악역인 백작과 이모부의 평면적인 캐릭터성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작은 초반엔 젠틀함과 능글함이 뒤섞여있으며 히데코를 유혹할 수 있다는 자신 만만함으로 무장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옴므 파탈인 듯 묘사됩니다. 하지만 히데코를 유혹하는 과정은 은밀하지도 않으며 대놓고 끈적한 스킨십을 유도하는 1차원 적인 방법인지라 누가봐도 감정상태가 불안정한 히데코가 사랑에 빠질 것이란 느낌을 안줍니다. 히데코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심리상태인 것을 알자 자신의 계획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숙희를 희생하여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는 상남자스러운 매력을 풍기기도 하지만, 숙희를 제거한 뒤 히데코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여자들은 사실 억지로 하는 관계에서 극상의 쾌락을 느끼죠' 라는 얼토당토한 말을 하며 강간을 시도하는 점은 특별한 매력없는 '나쁜놈' 이상의 느낌을 주기 힘듭니다.




이모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모부는 첫 등장씬에서 위로 바짝 솟은 눈썹과 먹물이 잔뜩 묻은 혓바닥 등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역대급 최종 보스의 포스를 풍겼으나 이후 존재감이 상당히 미비합니다. 일본인 아내와 조카 히데코를 수십 년간 노예로 삼은 점에서 뭔가 '가스라이팅'의 달인이라던지 사람의 심리를 손 안에서 가지고 노는 듯한 치밀함을 기대했는데, 극이 진행되면서 드는 생각은 '그저 변태'일 뿐입니다. 막판 백작을 고문하는 씬에서 극 내내 묵혀놓은 포스가 부활하나 싶었는데, 여기서도 '그저 변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최종 보스같은 이모부의 허술함 덕에 숙희와 히데코가 얻어낸 자유가 한층 더 쉬워 보입니다. 아무래도 히데코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한 두 악역의 너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포스의 이모부의 등장씬. 하지만 이게 최고 정점이었을 줄이야(출처 : 쿠팡플레이 캡쳐)




좋았던 점과 아쉬운 점이 공존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뛰어난 영상미와 매끄러운 스토리 전달력만으로도 약 2시간 30분의 런닝타임이 지겹지 않은 재미있는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또한 일본어, 동성애, 솔로 낭독극, 순진함과 주도면밀함을 모두 갖춘 복잡한 성격 묘사 등 온갖 어려운 연기들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김민희가 왜 당시에 최고의 여배우로 평가 받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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