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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화위복 Nov 26. 2022

CGV가 주었던 충격

자세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대략 2000~2001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린시절 부모님을 따라서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에 있는 'CGV 인천'에 갔었습니다. 그 때 받은 문화적 충격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CGV의 어떤 점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요?




당시 우리나라는 멀티플렉스라는 개념을 이제 막 도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CGV 인천'은 1998년에 개관했던 'CGV 강변' 이후 우리나라에 개관한 두 번째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어린시절 인천에만 주욱 살아온 저에겐 그 때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형태의 영화관이었습니다. 정식 매장 이름이 'CGV 구월(동)'이 아니라 'CGV 인천(광역시)' 이었던 점만 봐도 CJ측에서도 지금처럼 멀티플렉스가 우후죽순으로 생길 지 확신하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CGV 인천에 가기 전까지 제가 알고 있던 영화관의 모습은 화가가 그린 극장 특유의 간판이 걸려있는 단관극장의 모습이었습니다. 매표소는 영화관 입구에 위치해 있었으며, 표를 사서 들어가면 곧바로 상영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단관극장은 영화 관람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으며, 쇼핑이나 식사 같은 추가 소비활동은 주변 다른 곳으로 이동 후 해야했습니다.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동에 위치한 미림극장. 멀티플렉스 이전 전형적인 극장의 풍경입니다(출처 : 인천일보)




하지만 CGV의 등장은 이러한 영화 관람의 패턴 자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시 방문했던 CGV 인천은 '씨앤씨'라는 크고 넓은 복합 빌딩의 2개 층을 사용했습니다. 빌딩 안에는 한국에서 철수한 프랑스의 대형마트 브랜드 까르푸(현재는 홈플러스)와 식당가가 있었습니다. 방문한 시간대에 한 가지 영화만 볼 수 있었던 단관극장에 비해 14개나 되는 상영관에서 당대의 '핫한' 영화들을 골라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관 안에는 제가 어린 시절 미치도록 좋아했던 게임들이 모여 있던 게임센터와 성인들을 위한 포켓볼 당구장 등이 있었습니다. 지하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놓으면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쇼핑, 식사, 게임, 영화관람 등을 한 건물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입점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갖추고 있는 평범한 풍경들입니다. 2000년대 후반 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프리미엄 아울렛 건물들의 규모는 CGV 인천이 입주한 '씨앤씨 빌딩'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현대식 건물에서 영화 관람 외에 모든 걸 할 수 있다라는 개념의 충격은 개인적으로 피쳐폰만 보다가 이전에 각종 기기들이 했던 역할을 홀로 해내는 아이폰이 나왔던 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정작 첫 방문한 그 날 무슨 영화를 봤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처음으로 경험했다는 임팩트가 저에겐 더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1999년 CGV 인천 입점 광고 포스터. 당시만해도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얼마나 생소했는지 느껴집니다.




아이폰이 휴대폰 시장을 스마트폰 위주로 재편했듯, CGV는 빠르게 대한민국 영화 시장을 멀티플렉스 위주로 재편해 나갑니다. 구도심 곳곳에 위치해 있던 단관극장들은 CGV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사라져 갔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화관'하면 자연스럽게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형태를 떠올리게 됩니다. CGV의 성공을 참조하여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의 멀티플렉스 후발 주자들이 탄생합니다. CGV 인천 개관 당시의 '경험'을 샀던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저에겐 롯데시네마나 메가박스보다는 CGV가 더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대명사로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경험을 파는 것의 힘인가 봅니다.




최근 많은 기업들이 이런 경험을 파는 것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단순히 상품을 팔기 보다는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 오픈하는 백화점이나 쇼핑몰들은 더욱 크고, 더욱 다채롭고, 더욱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브랜드들이 도심 한가운데 다양한 컨셉들의 팝업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커피나 음식보다는 SNS 사진 찍기 좋고 브이로그를 만들기 좋은 독특한 컨셉의 가게들이 더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당시 CGV가 주었던 임팩트를 능가하는 느낌을 당분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나간 세월만큼 들은 저의 나이 때문에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큰 감흥을 받기가 힘들어진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경험'을 소비하는 트렌드를 이끄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 'SNS'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CGV에 큰 충격을 받은 이유는 SNS가 없었던 것이 컸습니다. 마치 미국 땅을 처음 밟아본 조선의 보빙사 일행처럼 멀티플렉스라는 영화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없는 상태에서 그 임팩트를 오감을 통해 직격으로 맞은 셈입니다. 




조선시대 보빙사가 봤을 19세기말 미국의 풍경




하지만 현대는 핫플레이스가 떠오르면 SNS를 통해 빠르게 공유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딘가를 방문할 때 쯤이면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해당 장소에 대해 이미 간접 체험을 마친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막상가서 체험하고 난 뒤에는 그 동안 사진으로, 영상으로만 봤던 것들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정도의 느낌 이상을 받기가 좀처럼 힘듭니다. 만약 제가 아직 가보지 못한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을 사전정보 없이 갔다면 입이 떡 벌어지게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사전정보를 얻지 않기가 더 어려운 것이 요즘 시대입니다.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17만개가 넘는 게시물이 나옵니다.




20년 전,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침공은 수많은 단관극장들의 문을 닫게 했습니다. 전국 곳곳에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생기고, 대한민국 영화시장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 5위권 규모까지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렬하게 등장했고, 끝도 없이 확장할 것 같았던 멀티플렉스도 OTT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의 출현에 주춤하는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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