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화위복 Mar 17. 2023

[직장생활] 주 69시간제에 대한 생각

'주 69시간제'가 뜨거운 화두 입니다. 9년 차 직장인 개미로서 현업에서 느낀 주 69시간제에 대해 간단하게 적어볼까 합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저 직장생활 중인 개미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취지는 좋다




고용노동부에서 예시로 발표한 근무표를 보면, 주 69시간제의 취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일이 몰릴 때도 주 52시간의 제한을 받다보면 일을 마치기 어려울 수 있으니, 빡세게 일을 하고 쉴 때는 쉬자'의 의도가 보입니다. 세상엔 다양한 직무가 있고, 직무마다 특성이 다 제각각 입니다. 주 69시간제의 취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직군은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제품 개발' 직무라고 생각합니다.




제품 개발 직무는 고객의 수요에 따라 제품이 기획되고,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각 프로젝트 단계별로 납기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개발 과정에서 다양한 난제나 변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주 52시간 이상 근무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개발 과제가 완료되면, 다음 과제 수행 전까지는 개점 휴업 상태에 돌입할 때가 있습니다. 즉, 과제 유무에 따라 근무시간 산포가 다른 직무보다 매우 큰 편 입니다. 과제가 없는 기간에는 회사에 나와서 불필요한 시간을 소모하기 보다는, 정부의 의도처럼 공식적인 휴일로 쉴 수만 있다면 개발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휴가가 늘어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주 69시간제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발현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용노동부에서 제시한 가상 근무표. 1~2주차 때 열심히 달리면 3~4주차 때 휴가가 생긴다.





하지만 현실은?




근무시간 관리를 위해서는 근무시간을 정확하게 자동 집계할 수 있는 근태관리 시스템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영세한 기업들은 이를 도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주 52시간제 도입 전 대다수의 중소기업이 아직 주 52시간제를 시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근태관리 시스템이 없고, 정부에서 52시간 시행 여부를 일일히 관리 감독을 할 수 없는 환경은 편법의 온상이 되기 쉽습니다. 심지어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대기업에서도 일손이 부족한 몇몇 부서에서 비근무 시간인 '제외시간 입력'이라는 편법이 성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근무를 한 시간도 비근무 시간으로 빼도록 직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지요. 제가 모든 회사를 다녀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제외시간 입력의 편법이 있는 부서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직 주 52시간제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회사가 영세할수록 과연 유연한 주 69시간제가 편법없이 잘 시행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동계, 하계, 징검다리 등 '누구나 다 쉬는' 기간이 아닌 이상 한 주에 이틀이상 연차 쓰는 것도 아직 눈치가 보이는 경우가 많은 현재 우리나라의 회사 문화에서 2주 간 열심히 일했다고 남은 2주를 한 주에 3~4일 씩 쉬는 것이 잘 정착될 수 있을까요? 현실은 감시의 사각지대에 놓인 회사일수록 고용노동부의 가상 근무표처럼 '62+53+24+32'가 아니라, '52+52+52+52'로 일했던 사람이 '62+62+62+62'로 일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즉 ,취지는 좋으나 과연 실제적인 운영이 될 수 있을까가 문제인 것이지요. 현실은 아직도 포괄임금제(추가 근무 시간 집계가 어려워, 급여에 일정 시간의 추가 근무 수당을 포함하는 형태)가 잔존하는 회사가 대다수입니다.




주 52시간제 시행 전, 중소기업의 66%는 준비되지 않았다(출처 : 인크루트)




벌어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격차




사실 근태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는 대기업은 이미 '69시간제'와 비슷한 월 근무시간 단위 탄력 근무제를 도입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기업들은 월 총 근무시간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69시간제가 도입되어도 기존의 52시간제 대와 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반면, 앞서 말했듯이 기업이 영세할수록 69시간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벌어져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근무환경의 격차가 점점 넘사벽으로 벌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과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누군가가 삼성전자에 들어간다고 하면, '이제 고생 시작이겠네'라는 말을 주고 받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기업은 돈 많이 주는 만큼, 많이 부려먹는다' 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선배들로부터 예전에는 밤 9시에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도망치듯 퇴근했다는 전설같은 일화들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실리콘밸리의 근태 문화가 국내에 소개되고, 조직 문화 쇄신에 대한 각 대기업들의 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아직은 과도기인지라 그 노력들이 전부 빛을 발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작은 변화가 이루어져 탄력/유연 근무제가 도입되고, 야근은 점점 지양되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야근은 더 이상 동의어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아직도 적응 못하는 어르신들도 계시지만, 직급 폐지와 상호 존대하는 방향으로 조직문화가 점차 진화 중입니다. 이처럼 대기업은 날이 갈수록 변모하는데, '주 69시간제' 도입으로 인해 중소기업이 근무환경에서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대기업은 '구직난'에, 중소기업은 '구인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좋은 환경에서, 일은 더 적게 하면서 돈은 많이주는 곳으로 가고 싶을 테니까요.




분명 취업 절벽이라는데..?(출처 : 사람인) (2019)


작가의 이전글 『더 세컨드 슬램덩크』에게 바라는 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