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알아듣는 꽃들의 이야기.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 영화를 구상할 당시만 해도 소율과 연희, 이 두 여자의 이야기로만 극을 끌어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업 영화로의 특성을 고려할 때, 남성 케릭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김윤우 역할을 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자본의 손이 망친 영화를 고르라면 꼭 이 영화를 고르고는 한다.
윤우를 빼놓고 보면 이 영화는 완벽해진다. (아 물론, 끝부분에 나오는, 연우가 소율에게 '사랑 거즛말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정말 좋다. 감정에 대한 나의 생각과 일치하기도 하고, 영화 전체적인 맥락과는 상관없이 그냥 그 장면 자체가 뼈저리게 좋다. ) 본론으로 돌아와, 윤우의 역할을 완전히 도려낸 상태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면, 주제가 명확하게 보인다. '너도 예쁘지만, 나도 예쁘다.'
명창 어머니의 끼를 물려받아 뛰어난 노래 솜씨를 지닌 소율은 권번을 이어나갈 인물로, 기생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진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던 소율은 자신이 좋아하는 윤우를 통해 존경하는 가요 가수 이난영과 만나게 되고, 윤우에게 노래를 받아 가요를 노래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진다. 같은 날, 소율을 찾으러 온 연희를 남기고 홀로 떠난 소율. 연희는 이난영의 집에 남아 노래 실력을 뽐낸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되는데 정가에 걸맞는 소율의 목소리와 달리, 연희의 목소리는 가요에 걸맞는 목소리로서 조선의 마음을 찾고 있던 윤우의 귀에 딱 들려온 것이다. 결국 윤우는 연희에게 음악을 주고, 소율과 혼인을 약속했던 윤우는 연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율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복수를 하게 되는데, 사실 이 뒷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고 전체적인 주제 의식과는 크게 관련이 없기에 굳이 적지 않겠다.
결국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소율은 자신이 원했던 가요 가수로서의 꿈도 빼앗기고 윤우와의 사랑도 빼앗긴 것인데, 사실 상 감독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자, 즉 빼앗긴 꿈에 관한 이야기다.
권번에 남은 소율은 계속해서 정가를 부르면서도 가요 가수로서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레코드를 낸다. 그렇지만 연희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심지어는 '서연희씨 처럼 불러보세요' 라는 말까지 듣기에 이른다. 집에 돌아와 연희의 노래를 틀어놓은 채 창법을 모사하다 목놓아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빼앗긴 꿈에 대한 절망과 열등감이 극에 달한다. 단지 소율은 능력이 없었기 떄문에 이렇게 목놓아 울어야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꿈을 꾸었기 떄문이다.
누군가에게나 맞는 옷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뛰어난 성악가가 가요를 부른다고 해서, 그 음악이 매력있게 느껴지지 않는 것 처럼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걸맞은 옷을 입지 못할 떄, 그는 빛을 볼 수 없다. 소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뺴어난 목소리와 예술성 높은 창법을 갖추었으며, 누구보다 뛰어나게 정가를 부른다. 반면 연희의 경우에는 대중성 높은 목소리를 지녔으며, 예술적 교양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의 심금까지도 울릴 수 있는 매력을 갖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요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소율과 연희는 서로 다른 능력과 매력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그렇지만 가요 가수로서의 삶을 원했던 소율은 자신의 매력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이 가지지 못한 연희의 성공만을 동경하기에 이른다. 연희가 부르는 노래도 아름답지만, 자신의 노래도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시작된 열등감은 결국 소율을 갉아먹기에 이르고, 그의 삶 전체를 잡아 삼킨다. 사실 이게 전체 스토리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 영화는 개인의 열등감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며 개인을 파국으로 이끌 수 있는지 생생하게 묘사해준다. 나는 남보다 못하다는 열등감. 우리는 쉽게 오해하곤한다. 남이 훌륭하다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그러나 너도 훌륭하고 나도 훌륭하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옆에 피어난 튤립도 못지 않게 아름답다. 그걸 꺠닫지 못한 채 남의 훌륭함에 비교하여 나의 부족함 만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 잠자고 있던 열등감은 깨어나 서서히 자아를 잡아먹어 간다. 소율에게서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다보면 영화를 본 사람은 한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소율이 질투를 느낀 것은 꿈보다는 윤우떄문이 아니냐고 말이다. 실제 영화에서도 소율은 연희의 성공에 곧바로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기 보단 끝까지 응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윤우와 소율이 입을 맞추는 것을 본 순간에서야 복수의 의지를 느낀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 처럼, 상업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한 영역에 불과하다. 사실 상 소율의 열등감은 연희가 조선의 마음을 부른, 그 순간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왜 소율은 계속해서 연희를 응원하는 것처럼 묘사되는 걸까? 윤우의 존재는 왜 필요했던 걸까? 이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의 특징에서부터 답을 얻을 수 있다. 열등감. 모두가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숨기고자 하는 감정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흔히 치졸한 것으로 묘사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감정이 매우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것임을 알고도 최대한 숨기고자 한다. 쉽사리 정당화 될 수 없는 감정이며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인 소율이 오직 열등감 하나로 인해 연희에게 복수를 계획한다는 스토리는 힘이 없게 느껴졌을 수 있다. 그렇기에 소율이 복수를 할 만한 더욱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윤우와 연희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가 가장 믿었던 절친한 친구가 바람이 났다는 설정은 누가봐도 납득 가능한 복수의 동기이며, 스토리 상 계연성이 확실해진다. 그렇지만, 이는 본 영화가 매력을 잃어버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의 배신에서 나오는 증오, 그리고 복수. 너무나도 흔한 주제이며 영화의 매력을 반감하는 요인이 된다. 조금은 생소하기는 할지라도, 우리가 모두 외면하고자 하는 감정인 열등감과, 이를 대하는 개인의 솔직한 태도를 여과없이 보여줬더라면, 마치 마더에서 모성애의 아이러니를 폭로한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 좋은 걸 왜 그 떄는 몰랐을 까요. 자신의 노래 '사랑 거즛말이'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을 본 소율은 그 때서야 꺠닫는다. 그 떄의 자신도 눈부시게 예뻤다는 것을 말이다. 너도 예쁘지만 나도 예쁘다.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선 반짝 빛이 난다. 빛이 모이고 모여, 공간을 밝히는 것처럼 모두가 자신의 빛을 밝게 빛낼 수 있길. 주의의 별들에 기죽은 채, 스스로의 빛을 가려버리지 않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