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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스윙댄스: 금현 자전신화¹

금현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의 서문과 수기의 서사방식을 주요 모티브로, 오드리 로드의 자전신화 『자미』의 위험천만하면서도 강인하고 위트 있는 여정을 살짝 흉내 내었다.




   프롤로그


   열 살쯤 돼 보이는 사진이다. 여동생 둘과 한복을 차려입고 청기와집 앞마당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갸름한 얼굴에 저고리 매듭이 마음에 안 드는지 한복 고름을 만지작거린다. 대보름날 부럼을 깨고 엄마가 그날만 해 주는 시뻘건 립스틱을 칠한 채 보름달을 등지고 동생들 옆에서 흐릿하게 미소 짓고 있다.


   두 번째 사진 속 얼굴. 이건 놀랄 만큼 훌쩍 시간을 뛰어넘었다. 검은 상의에 정면을 응시하는 매서운 눈빛, 검정 마스크를 꼈다. 마스크는 두 겹으로, 흰 끈과 검정 끈이 겹쳐 보이고 검정 마스크 위에 얇은 흰색 펜이 “내 몸은 내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꽉 다문 입, 오른 주먹은 가슴께에, 왼 주먹은 ‘내가 결정한다’ 문구가 적힌 턱 근처에서 불끈 쥐었다. 가르마 중간에 희끗희끗 삐져나온 흰머리가 결연한 의지의 상징처럼 보인다.


   마지막 사진이 가장 흥미롭다. 한복을 입은 열 살 정도의 소녀가 영정사진을 가슴에 꼭 안고 앉아 있다. 영정사진 속 여인은 솔리드 탑 검정 모자에 진보라색 라운드 재킷을 단정히 차려입고 왼손을 턱에 괴고 있다. 세상이 여전히 신기하고 흥미롭다는 듯 엷은 미소로 정면을 빤히 쳐다본다. 입가의 주름은 시간의 속도를 순순히 따라가는 형세다.


   호기롭던 그 시절


   호기로운 인생을 보냈습니다.

   저는 경북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동네 친구들과 딱지치기, 비석치기, 오징어게임, 말 타기, 멀리뛰기 등을 하며 자랐습니다. 치고 던지고 멀리 뛰기는 남만큼 했는데, 친구 등에 올라타는 말 타기는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쯤 오르면 탈 수 있겠지 하고 가보면 으레 개구쟁이 친구가 등을 꼿꼿이 세워 그 앞에서 멈춰 서곤 했습니다. 어릴 적에 기억에 남는 일은 야외수업을 들을 때입니다. 소나무 옆에 앉은 것 같은데, 한 아이가 제 등에서 뭔가를 털어냈습니다. 뭐지 하며 뒤를 보는데, 초록색 벌레가 친구의 손바닥에서 꼬물꼬물 놀고 있었습니다. “으악” 하며 일어나 몸을 터는데, 송충이가 두둑 미끄러졌습니다. 웬 호들갑이야? 하는 표정, 무슨 일 있냐는 듯 무심한 아이, 신기한 듯 까르르 웃던 그 시절 친구 생각이 납니다.


   초등학교 때 이사와 전학을 많이 다녔습니다. 친구와 친해질 만하면 전학을 갔고, 전셋집을 옮길 때는 엄마 뒤에 저만 따라붙거나 가끔 둘째를 데려갔습니다. 셋째와 넷째는 이사한 뒤에 집주인께 90도 인사를 시켜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엄마 심부름으로 저녁에 몇 번 번개탄을 사 온 적이 있습니다. 연탄집게를 가지고 번개탄을 불쏘시개로 갈아 끼웠습니다. 워낙 연탄을 피우고 자다 질식사한 일가족 뉴스가 많던 시절이라 연탄 잘 피우는 일은 대단한 소임이었습니다.


   저는 살림의 고달픔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가난을 짐처럼 이고 다니면서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믿은 어머니 세대가 그러했듯 저희 엄마도 ‘살림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공부만 하라’ 하셨습니다. 둘째가 공부하다 머리 식힐 겸 운동화나 양말을 빨려하면 엄마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짓 한다”며 화장실에서 쫓아냈습니다. 요리에 진심인 셋째가 칼질 소리에 주방을 기웃거리기만 해도 방으로 곧잘 떠밀렸습니다.


   물론 저는 살림에 젬병인 데다 공부에 한이 맺힌 엄마의 마음을 십분 헤아렸습니다. 감히 빨래를 하겠다고 설레발치거나 요청하지 않았는데 주방에 얼쩡거리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살림과 거리를 두는 데 나름의 요령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호인으로 세 딸을 두 아들과 차별 없이 키우셨습니다. 서울로 이사 가는 중요한 일을 장녀인 저와 의논하셨고, 분별없는 초등학생의 의견대로 부산에 남고야 말았습니다. 장녀가 잘돼야 나머지 동생들도 잘된다는 굳은 신념의 소유자로, 최대한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어느 날은 돈 개념도 없던 제게 오백 만원이란 큰돈을 주셨습니다. 갓 대학에 입학한 터라 없던 교양을 포장하려고 클래식 턴테이블과 클래식 음악 LP 전집을 왕창 사들였습니다. 동생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학정석 해제 테이프 전집도 샀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부르시더니 돈을 저축했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쓰라고 주신 거 아니냐”고 되물었더니 저축할 줄 알았다며 허허 웃고 마셨습니다.


   크레이지 K-장녀의 폭풍 성장기


   저는 ‘가부장제의 감옥’에서 쓸데없는 책임감을 잔뜩 머리에 이고, 온몸에는 겸손을 겹겹이 두른 채 습관적인 양보를 미덕으로 아는 그저 착하기만 한 K-장녀였습니다. 오 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친구 싸움을 말리다 도리어 눈을 맞아 시퍼렇게 멍든 눈을 숨기고 있던 막내 남동생의 실명위기를 해결하고, 수술한다고 엄마 머리에 직접 약품까지 바른 상태에서 부 주치의의 만류를 듣고 뇌혈관 동맥류 수술을 취소하여 엄마의 생명을 연장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 간병을 못 하겠다는 엄마를 대신해서 대장암과 탈장 수술 기간에 혼자 아버지를 간병했습니다. 첫 출산한 병원의 실수로 셋째 여동생이 제대로 앉지 못했을 때는 믿을 만한 부인과 의사를 연결하고, 둘째 여동생을 걱정하는 엄마를 위해서는 저희 수준에 과한 돈을 둘째 여동생에게 송금하기도 했습니다.


   결혼할 때도 엄마의 노후를 걱정하며 알아서 결혼할 테니 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제게 두 남동생이 세 배에서 무려 열 배나 많은 결혼 비용을 받았다는 셋째 여동생의 말은 충격이었습니다. 한동안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배신감과 원망이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겪은 기업의 악의적인 갑질은 도를 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간 지 삼 년 만에 전격 퇴출되었습니다. 남성으로 채우려고 여성을 경쟁시킨 것도 모자라 단체로 여성들을 해고했습니다. 명백한 부당해고인데, 당시에는 부당해고인 줄도 모르고 맞서 싸울 줄도 몰랐습니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에는 노년의 부모를 돌볼 시기가 오면 으레 딸과 며느리를 호출하는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대다수 기관의 핵심에 남성들만 포진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가정과 직장, 사회 도처에 만연한 여성 차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페미니즘 덕분에 보이지 않던 구조적 차별에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습니다. 의심 없이 지나치던 사회 현상이나 언어들을 의심하며 질문하고, 평생 처음으로 아닌 것에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페미니즘의 최대 수혜라면 당연한 제 몫을 찾은 일입니다. 엄마 노후를 생각하며 양보했던 아버지 유산을 돌려받고, 반려인의 재산과 합쳐 공동명의의 집을 구입했습니다. 정당한 재산 청구였고, 평생에 잊지 못할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장녀 건들지 마. 눈빛이 차분하다고 얌전한 게 아니라 차분하게 돌아있는 것뿐이야. 건들지 마, 경고했어. 크레이지 아시안걸 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기억해.”


   2019년 7월, 한 트위터 이용자가 올려 K-장녀라는 말이 태동했다고 추정되는 이 말은 페미니스트가 된 이후 완전히 달라진 제 태도를 시원스레 설명합니다.


   창작의 춤사위


   회사 선배의 예언 중 하나는 들어맞았고, 하나는 빗나갔습니다. 출판 일을 해보면 좋을 거라는 근접치의 예언은 맞았습니다만 그림을 잘 그린다는 애정 어린 평가는 빗나갔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장르를 탐험하며 글을 쓰는 창작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김소월 시를 몇 편이나 줄줄 암송하는 엄마의 영향인지 시가 마냥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는 없었습니다.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 외에 소설을 읽은 경우는 친구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돌려 읽던 하이틴 로맨스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린 여성이 돈 많고 잘생긴 왕족이나 굴지의 기업 대표를 만나 신분을 세탁한다는 일명 신데렐라 신드롬을 부추기는 외국 스토리들로, 당시 출판 관계자들의 시선에서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릴 것으로 예상되는 여성청소년들에게 잘 먹히는 주제였습니다. 


   몇 년 전 정말 우연한 기회로 페미니즘 출판사가 주관하는 ‘옛이야기 바꿔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각자 바꾸고 싶은 옛이야기를 찾고 그것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인어공주를 좋아했던 창작자는 인어공주를 계속 써왔는데 이번에는 꼭 완성해 보겠다 했고, 다른 창작자는 선화공주에 꽂혔고, 어떤 이는 선녀와 나무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만 바꾸고 싶은 옛이야기를 못 찾아 두 달 가까이 헤맸습니다. 간신히 ‘백일홍 이야기’를 찾아 판타지동화로 개작했습니다.


   제가 채택한 백일홍 설화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수록된 것으로, 산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 구조에 남성 영웅의 괴물퇴치와 여성 구원 서사인 데다 결말은 구원자 남성을 기다리던 여성이 자결하는 가부장제의 전형성을 고루 갖춘 설화였습니다. 배롱나무 백일홍 이야기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완전히 이야기를 뒤집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여성을 희생시키는 것에 결사반대할 공동체는 단연 강인하고 야무진 제주도 해녀가 적역이었습니다. 다음은 이무기가 등장할 만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탐라국의 창조여신인 설문대할망을 호출하고, 세 딸 중 막내 호백이를 중심으로 대상군인 어멍(엄마) 고만덕과 심방(무당), 잠녀(해녀) 삼춘(남녀 구분 없이 어른)들의 연대로 이무기를 용으로 승천시키는 서사를 창조했습니다.


   두 번째로 창조한 이야기는 SF 형식의 소설입니다. 초고 제목은 “지구별 포식자”였는데, 퇴고 중에 “양계장의 파란”으로 고쳤습니다. “2050년 에이플러스백신연구소와 수의 계약한 닥치고 농장에 인간 닭 두 마리가 들어왔다!”는 로그라인에 개성 있는 인물을 주인공 주변에 배치하고 극적인 비밀을 방출함으로써 변화, 성장, 도태되는 인물 유형을 표현했습니다. 탈고를 위해 인물의 대사와 행동 유형을 계속 수정, 보완하는 중입니다.


   에필로그


   스윙 음악에 맞추어 즐기는 파트너댄스가 스윙댄스라면 지금껏 나는 이끄는 리더 없이 홀로 스윙댄스를 잘도 추었다. 가끔 황홀한 춤사위를 선보이며 으쓱하다가, 한 순간 웃음을 잃고 억지 스텝을 밟거나 원하는 춤사위가 안 나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부질없어.” 하며 허탈해하기도 했다.


   사실 지금 죽어도 후회 없다. 삶의 굴곡과 무게를 견디고 다독이며 살아왔으니까.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힘센 언어인 페미니즘을 만났으니 됐다. 그거면 충분하다. 페미니즘이 날 건너뛰지 않고 주인을 잘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수많은 다국적 여성과 퀴어, 장애인과 반려종들이 오늘의 나를 창조하고 키워냈다. 깊이 감사한다.


   이제 당신 차례다. 부디 당신만의 자전신화를 당장 써 내려가길. 계속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²과 함께하길 바란다. 당신과 나는 기존 질서에 자꾸 균열을 내고 이상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 운명을 타고났다. 서로 책 쓰고 낭독하는 또 다른 자리에서 반갑게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

금현


죽음을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의외로 재미나고 색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능청스런 문체를 허스토리로 덮었다.



1  오드리 로드가 만든 조어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아우르는 자기 정체성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2  하미나의 책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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