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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관계

난다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또 넘어졌다. 이쯤 되면 연례행사라 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곤 했던 나는 언젠가부터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끗하는 날이 많아졌다. 한번 약해진 발목은 자꾸 같은 곳을 깨물어서 너덜너덜해진 입 속처럼 완전히 아물지 못했다.


   10년 전에는 무릎 수술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한두 달 정도 무릎이 계속 아파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무릎이 선천적으로 연골 기형이라 충격 흡수를 잘 못하는데, 잦은 충격을 받아 찢어져서 통증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수술을 하고 치료도 받고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어느 정도 회복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관절은 생각만큼 다시 튼튼해지지 못했나 보다.


   며칠 전 우리 집 강아지 유자랑 산책하다가 넘어져 오른쪽 발목을 다쳤다. 몇 년 전 겨울, 눈이 내려 꽁꽁 얼어붙은 길에서 균형을 잃고 넘어져 다쳤던 쪽이다. 작년 겨울,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넘어진 곳이기도 하고, 올여름 산책 중에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다 다친 쪽이기도 하다.


   ‘아, 이거 깁스할 것 같은데….’ 단차가 있는 건물이었다. 한쪽으로 우당탕탕, 엉덩방아를 찧듯이 넘어지자마자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무릎, 그리고 복숭아뼈 주변과 발바닥까지 ‘찌이잉’한 통증이 퍼진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자주 다치다 보니 부상 정도를 대충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며칠 파스 붙여주면 괜찮아, 당분간 찜질과 보호대를 해야겠군…. 그런데 이번엔 무조건 병원 각이다. X 됐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반려인이 물었다. 산책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주저앉아서 끙끙거리고 있으니, 유자는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들며 얼굴을 핥아댔다. 내가 들고 있던 산책줄을 반려인에게 넘겨주고 그에게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일어났다. 평소라면 10분이면 돌아올 길을, 20분 넘게 걸려 걸었다. 집에 도착해서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다행히 골절은 아니지만 통증이 심하기 때문에 깁스를 하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직장동료 등 주변인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재택근무를 선언하며 계획에 없던 ‘집콕 생활’이 시작되었다. 강아지 유자와의 산책은 반려인의 몫이 되었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오는 것 말고는 외출하지 않은 지 나흘째. 깁스에 붕대까지 감고 있어야 해서 씻거나 움직일 때 불편한 것 말고는 오랜만에 여유롭게 쉬는 기분이라 솔직히 좀 좋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 아니지만.


   집에 계속 있다 보니 유자랑 같이 있는 시간도 늘었다. 유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인간이 요즘 왜 계속 집에 있는지 궁금하지는 않을까?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자는 내가 식탁에 앉으면 식탁 밑으로 와서 눕고, 거실에 앉으면 거실 벽면의 켄넬 안에 들어가고, 침대에 누우면 침대로 폴짝 올라온다. 유자의 따끈따끈한 체온에 기대어 같이 쉬고 있으면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싶다.


   작년 여름, 유자를 입양하기 전에 고민이 많았다. 나와 반려인 둘 다 준비가 덜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강아지를 가족으로 맞이하자고 결심하기까지.


   제주도 어느 마당에서 태어난 강아지 유자는 모견과 다른 형제자매들이 함께 구조되어 임시 보호 중이었다. SNS에 올라오는 강아지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보며 하루하루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이들이 서울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직접 만난 유자는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우리는 다음 날 바로 입양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때 우리가 유자를 맞이할 수 있었던 건 시간을 더 보낸다고 해서 그만큼 준비가 잘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자의 임시 보호 기간이 끝나서 갈 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도 영향을 주었다. 또 둘 다 계획형 인간이 아니다 보니 일단 살아보면서 부족한 건 채우고 직접 부딪히면서 갖춰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본가에서 강아지와 살아본 경험이 있는 반려인과 달리 나는 이렇게 오래 강아지와 붙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잘 모르고 시작했기에 개에 대해 더욱 잘 알고 공부해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빼먹을 수 없는 아침 저녁 산책, 간식과 사료의 종류, 귀 청소, 목욕하기, 예방접종, 개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 등 일상생활에 관한 것부터 개의 시그널과 언어, 스트레스 관리, 리쉬 잘 잡는 법, 차분하게 산책하는 법, 타인 및 타견에 대한 매너, 둔감화나 긍정강화라는 교육 방식 등 개와 이 사회에서 잘 살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도 많았다. 온통 몰랐던 것들 투성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전보다 부지런해졌다. 유자랑 이곳저곳 다니며 운동량도 늘었다. 다른 건 좀 미뤄도 유자랑 하는 하루 두 번 산책은 꼭 지켰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아프거나 다치면 곤란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면 그만큼 유자에게도 영향이 가니까. 그래서 넘어졌을 때 가장 먼저 산책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못 움직일 텐데 유자는 어떡하지?’ 다행히 유자의 돌봄을 함께하는 반려인이 있어서 큰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지만, ‘만약 둘 다 아프거나 다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물론 주위에 이웃들이 있고, 우리가 부탁하면 흔쾌히 응할 사람들이라는 걸 알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슬쩍 심란해졌다.


   생각해 보면 삶이라는 건 언제나 돌봄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약할 때가 있다던가, 아니면 약한 모습이 있기 마련이기도 하고. 나도, 이 세상 그 누구도 지금까지 돌봄 받지 않은 적이 없는데 왜 막상 돌봄을 청해야 할 상황을 떠올리면 뭔가 작아지는 기분일까?


   꼭 아픈 몸이 아니더라도 서로 기대고 보살피는 일은 삶에서 빠질 수가 없다. 그런데도 돌봄은 오랫동안 중요하지 않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고, 그에 따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의존성과 취약성이라는 특성은 ‘폐 끼치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니까 내 마음 어딘가에도 나의 취약함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더 얹어주는 것이고, 타인에게 민폐 끼치면 안 된다는 믿음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돌보는 관계는 앞만 보고 전진하거나 매정하게 떨치고 가버리는 관계가 아니다. 뒤돌아보고 살피는 관계다. (…) 뒤돌아보지 말라고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강조하게 된다면, 뒤돌아보기를 어렵게 만드는 돌봄의 힘겨운,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 김영옥·류은숙(2022), 돌봄과 인권, 코난북스 중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지만, 조금씩 천천히 걷고 있다. 산책도 예전처럼은 못하지만 집 앞이나 바로 근처까지 같이 나갔다가 나만 먼저 들어오기도 한다. “오랜만에 둘이 같이 나와서 그런가, 유자가 더 좋아하는 것 같네.” 산책줄과 간식 가방을 챙기며 반려인이 말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에너자이저인 유자는 신이 나면 우다다를 하며 달려 나가려고 하는데 오늘따라 유자가 나를 돌아본다. 곁에서 나란히 걷다가 내 걸음이 늦어서 뒤처지면 어김없이 나를 뒤돌아본다.


   유자의 세상에는 너무 늦었다는 타박이 없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압박이 없다. 다른 누군가를 이겨서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경쟁도 없다. 새로운 세계에서 나의 부지런함이 한편으로는 재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니까 빨리 배우고 익혀서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완벽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어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어설프고 취약한 점을 가진 존재로서 능숙하지 못하더라도 서로 돌볼 수 있는 삶이 필요하다고. 그래야 아파도, 아픈 몸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돌보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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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자칭 발목 삐끗 전문가.

제주도 출신 유자와 라면이 주식(主食)인 반려인과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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