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몇 안되는 장점 하나를 잃어버렸다.
출산 후 100일쯤 지나면 머리 감을때마다 머리가 뭉텅뭉텅 빠지기 시작한다. 출산 이후 급격한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평소에도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니깐 뭐 그럴 수 있지 싶었는데 정말 탈모를 고민할 정도로 빠졌다. 출산 전 이미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막상 내가 직접 경험해 보니 무서웠고, 한편으로 많이 서러웠다. 샤워를 하다말고 발등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는 물 때문에 수챗구멍에서 머리카락을 빼내야 했다. 엄마가 되는 길은 출산 이후로도 험난한 것이구나. 종종 ‘엄마가 되면 여자로의 인생의 끝이야’라는표현은 다소 극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숭덩숭덩 빠지는 머리카락들을 보아하니 그 말이 맞나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특히 앞머리가 가장 많이 빠지는데, 화장대 앞에 앉아서 휑해진 이마와 신혼여행 시절 상큼했던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출산이 가져온 급격화 변화, 아니 급격한 노화에 다시 한번 우울해졌다. 특히 가르마가 시작되는 영역은 10원짜리 동전만큼 텅 비어 버렸다. 안그래도 이마가 넓어 초등학교 시절 황비홍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나인데, 나의 이마라인은 광개토 대왕마냥 북진하여 그 영토를 더욱 넓혀버린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 무자비하게 빠진 머리카락은 다시 자란다. 사람마다 그 시점의 차이는 있는데 나는 탈모를 꽤나 오랫동안 겪다가 아기 돌 즈음에서야 머리카락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이때가 바로 ‘잔디인형’이 되는 시기인 것이다. 머리카락이 잔디로 되어 있는 잔디인형처럼, 엄마들의 앞머리 라인에도 삐죽삐죽 갓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들이 하늘로 향한다. 와! 머리카락이 난다!라고 좋아할 수도 있지만 이때가 제 2의 ‘외모 쇠퇴기(?)’인 것이다. 삐죽삐죽 자란 앞머리는 요상하게 사람을 빈해 보이게 한다. 만삭 즈음에 출산 준비를 한다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당근 거래를 했는데, 그때 만난 몇몇 애기엄마들이 생각났다. 힘든 육아에 찌든 일상도 있지만, 이상하게 더 피곤해 보이던 모습... 그것은 바로 그녀들의 잔디머리 때문이었다. 하늘로 아무렇게나 치솟은 삐죽삐죽 앞머리는 검정고무신 시절마냥 사람의 인상을 참 요상하게 만들었다.
잔디인형의 상태로 나는 복직을 했다. 출산휴가를 들어갔을 때만 해도 전세계는 평화로웠는데, 내가 복직한 시점은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겨우 2달 정도만 지난 시점이었다. 재택근무가 급격히 늘어났고, 회의에 참석하면 절반 이상은 집에서 화상회의로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직 후 얼마되지 않아 회사 회의실에서 화상회의를 처음 하는데, 이때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의 허전한 정수리를! 회의실마다 회의실을 비추는 카메라가 회의실 TV 위에 높게 설치되어 있었고, 그 카메라의 시점은 사람들의 정수리였던 것이다. TV 속 여러 정수리들 중 가장 밝게 훤한 정수리, 그것이 나의 정수리였다. ‘아이고! 내 정수리!’하고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버렸다. 내 두 손은 쏜살같이 정수리를 가리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동료들도 내 소리에 깜짝 놀랬다. ‘아이고, 출산 이후에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더니 제 정수리가 너무 훤해졌네요.’라고 말하고 서둘러 회의를 시작했다. 동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회의실 카메라를 연결할때 마다 그 누구보다 하얗게 속살을 내보이는 정수리에 나도 모르게 ‘출산 때문에 정수리가 훤하네요’라는 말을 자꾸 하게 되었다. 누가 내 정수리를 먼저 보는 것도 아닌데...
한 손가락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나의 몇 안되는 외모적 자랑거리 중 하나가 풍성하고 윤기있는 머리카락이었다. 부모님 두 분이 연세에 비해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지 않고 흰머리도 많지 않아 머리카락만큼은 부모님의 우수한 유전자를 받았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출산으로 인해 나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이렇게 또 사라진 것 같아 꽤나 씁쓸했다.
어느 날, 남편에게도 물어봤다. ‘오빠! 내가 애기 낳고 정수리가 이렇게 훤하게 빈 거 오빠도 알았어?’ 그랬더니 돌아온 남편의 대답은 또 다시 나에게 충격이었다. ‘응~ 그렇긴 한데 결혼 전 연애할 때부터 좀 훤하긴 했어~ 그래서 말 안했는데?’ 아, 그랬던 거구나. 그건 몰랐어... 어쨌든 남편에게 고마웠다, 나의 훤한 정수리도 사랑해줘서.
얼마 전, 마흔이 된 기념으로 여고동창생 네 명이서 여수 여행을 다녀왔다. 술 한잔씩 하면서 예전과 같지 않은 체력과 노화에 대한 고민들을 얘기하는데, 다들 머리카락을 들추면서 흰머리를 보여준다. 그래도 나는 아직 흰머리는 하나도 없다. 그 네 명 중 유일하게 흰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이제 이마 라인도 정수리도 훤하지만 그래도 우수한 머리카락 유전자를 받은 건 틀림없다. 감사합니다, 부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