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에서 내 주도권 빼앗기지 않기
알게 된 곳
: 기술 윤리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던 1월, 강릉의 한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구한 방법
: 책방에서 구입해서 종이책으로 읽었다.
읽은 기간
: 2023년 2월 13일 ~ 3월 19일
첫 장을 읽기 시작하고 한 달이 되어서야 다 읽었다. 2부에서 철학적 개념을 다루는 부분이 잘 안 읽히긴 했어도,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아 조금만 집중하면 한 달까지는 안 걸렸을 책이었다. 2월 13일에서 3월 19일 사이 나는 넷플릭스에서 더글로리 파트 2를 정주행 하고, 연애대전 10편을 연달아 모두 봤다. 트위터에서 KBO 시범경기 야구 클립을 보고, 인스타그램에서 친구들과 대화했다. 유튜브에서 1분짜리 숏폼 영상을 두시간씩 보기도 했다. 디지털 세계에 주의를 빼앗기면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점점 뒷전이 되었다. 독서 모임이 잡혀있지 않았다면, 언제쯤 다 읽게 될 수 있었을런지 모르겠다.
작년 하반기에 인상 깊게 읽었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 자주 떠올랐다. 그 책을 읽고서 디지털 세상에서 UX를 고민하는 모든 제품 담당자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UX 뿐 아니라 테크 업계에서 일하는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주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아젠다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공감이 되었던 것은, 디지털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가 하는 일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휴대 가능하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범용 컴퓨터가 확산되면서 이러한 산업화된 설득 시스템이 다른 모든 사회적 시스템을 우회해 우리의 주의력으로 곧바로 접근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이 시스템은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수십 명의 사람 손에 수십억 인구의 주의적 습관, 즉 삶을 형성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져 있다. (134쪽) 테크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이 가진 영향력에 비해 낮은 책임감을 느낀다. 잘 짜인 관료제 덕택일까. 회사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은 그들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열심히 노력할 뿐이다. 오늘의 지라 티켓을 닫아야 하고, 오늘의 워크로그를 쓰는 틈에 나의 성실이 가져온 사회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구글에서 십 년 동안 전략가로 일하면서 검색 광고 분야에서 큰 공로를 인정받았던 저자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결국 비난할 대상은 없다. ‘결함’이 있는 것은 개인의 내적 의사결정 구조가 아니라 복잡한 다중 작용 시스템의 새로운 구조다. 품질경영의 대가 윌리엄 에드워드 데밍은 이렇게 말한다. “악한 시스템은 언제나 선한 인간을 압도할 것이다.” (156쪽) 문제는 시스템이다. 인간은 시스템을 만들고, 만든 시스템에 스스로를 가져다 놓는다. 때론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일을 한다. 시스템에 의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 시스템이 악하다면? 그 시스템이 우리의 자유를 방해한다면? 어떤 이는 자신의 자유가 방해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력과 주의력을 탓하는 나이브한 세상이라면? 한숨만 나온다.
디지털 디톡스 캠프를 가고, 스크린 타임을 걸어두고, 방해 금지 모드를 써도 시스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테크 업계 전반에서 인프라에틱스 infraethics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선 제품 내에 사용자가 자신의 주의를 통제할 수 있는 형태가 기본 설정이 되어야 한다. (170p.) 우아한형제들에 재직 중인 혜진 님은 독서모임에서 아이폰의 스크린타임을 언급하며 이런 말을 했다. "아이폰 입장에서 본인들은 하드웨어를 공급하면 끝이니까, 스크린 타임 같은 것도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만약에 유튜브가 그 기능을, 내가 1시간만 설정해 놓고 사용 못하게 하는 그런 기능을 메인에 걸어 놓고 제어해 줄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실 매출과 연계되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성인 사용자를 대상으로도 이러한 설정이 가능할까? 그런 것을 유튜브가 제공할 수 있을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디지털 세상에 주의력을 빼앗기는 일들을 ‘중독’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치지 않고, 설득적인 기술을 세세한 언어로 나누어 보는 것도 좋겠다. 윤리적으로 두드러진 기준에 따라 ‘설득적인’ 기술 용어들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다. 이 표에서 Y축은 기술 설계가 사용자에게 가하는 제약의 정도를 나타내고, X축은 사용자와 기술 설계 사이 목표 일치 정도를 나타낸다. (171-172p.) 이렇게 언어를 구분하고 나면, 우리가 만들고 있는 시스템이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고 한 번의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기술이 우리의 정보를 관리하는 방식에 관한 투명성을 요구해 왔다면, 이제는 우리의 주의를 관리하는 방식(177p)을 고민할 시간이다.
의료계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은 ’ 설계자 선서‘를 제정하는 방법도 있다. 어디서 어떻게 누굴 대상으로 무슨 내용을 담아 선서를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많이 남지만, 선서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상기시켜 주며, 특정한 가치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을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 행동에 대한 책임을 부여한다.(178p.)는 저자의 접근이 터무니없는 주장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는 Microsoft에서 AI 윤리를 다루는 ethics and society 팀을 전원 해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의 숏폼 영상이 청소년에게 얼마나 유해한지 다루는 다큐도 있었다. (성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매우 유해하다.) 디지털 세상의 주의력 뺏기 경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AI 제품을 보면 이런 논의를 시작하기에 이미 늦은 것처럼 보인다.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내가 원하는 별빛을 따라, 햇빛을 온전히 받으며 살아가기에는 이미 시스템이 내 삶을 장악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인류가 돌도끼에 손잡이를 달기까지 140만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반면 웹의 역사는 이제 1만 일도 되지 않았다.(188p.) 작게나마 우리나라 테크 업계에서라도 이 아젠다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모여서 액션을 취해보고 싶다. 그것이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