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모호함이나 모순의 여지를 둔 삶으로
알게 된 곳
: 6월 즈음 어떤 팟캐스트에서 알게 되었고, 김보라 감독의 추천사가 적힌 띠지를 보고 더 궁금해졌던 책이었다.
구한 방법
: 회사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읽은 기간
: 2022년 8월 12일 ~ 9월 4일
몇 년 전 재미있게 읽은 올가 메킹의 <생각 끄기 연습>이 떠오르는 순간이 많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정치사상서에 가까운 책이었다. 테크 기업이 많이 있는 베이 지역 Bay Area에 사는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고도로 발달한 기업 문화와 광활한 산맥 사이에 사는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실제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디지털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22쪽)"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여 머무르도록 노력하는 관심 경제의 시대에서 관심의 주체성과 주도권을 말하는 순간, 이 책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관심 경제와 설득적 디자인 Persuasive Design에 관한 논문을 쓴 데방기 비브리카는 사용자의 관심을 붙잡아두려 부단히 노력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인간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며, "승패는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설득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뿐"(201쪽)이라고 말한다. 나약한 인간의 주체성만으로는 교묘하게 디자인된 디지털 공간을 이겨낼 수 없으므로, 디지털 공간을 디자인하는 이들에게 윤리적 측면을 호소하는 편이 더 타당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반격을 가한다. "나는 관심을 두고 벌이는 전쟁에서 내가 이미 패배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주체성이 있는 행위자이며, 그저 나에게 더 좋다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관심을 돌리기보다는 내 관심의 통제권을 쥐고 싶다."(201쪽)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네가 상품이다'라는 구글 디자이너의 유명한 말이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사용자의 모든 관심과 선택은 '이벤트'나 '액션' 단위로 치환되고, 교환이 가능한 통화가 되기도 하고, 제품을 디자인하는 이들에게는 설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나의 관심이 사용자 그룹 A의 이벤트 하나로 쉽게 치환되지 않으려면 "더욱더 깊고 단단하고 미묘한 형식의 관심"(202쪽)이 필요하다.
저자가 이러한 깊고 단단한 관심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비단 '거대 테크 공룡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은 예술가와 작가뿐 아니라 삶을 한낱 도구 이상으로, 다시 말해 최적화할 수 없는 무언가로 여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18쪽)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살아가는 세계가 "내 스포티파이 계정의 새 위클리 추천곡 플레이리스트와 유사한 상황"(231쪽)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나를 놓아두지 않으면, 내 세상은 누군가 짜 놓은 알고리즘에 의해 쉬지 않고 돌아간다. "정보는 특별한 순서 없이 나에게 돌진해 오며 영상을 자동을 재생하고 헤드라인으로 내 관심을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 화면 뒤에서 실제로 탐색되고 있는 것은 바로 나"(287쪽)일 것이다.
관심 경제 속에서 쉽게 길을 잃는 우리의 문제는,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를 지우고 계정을 탈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과도한 자극이 현실이 된 세상에서, FOMO(the fear of missing out,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를 NOSMO(the necessity of sometimes missing out, 가끔은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로 전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발휘하려면 혼자서는 쉽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존재들과 손을 잡는 것, 우연한 공간에 나를 놓아두는 것, "아침에 눈뜨자마자 결과물을 내고 끊임없이 연결되는 일"(57쪽)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거창하고 요란스러울 것도 없다. 그저 산책길에 스포티파이가 자동 재생해주는 음악을 듣지 않고, 나무에 숨은 새들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으로 시작해도 좋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난 후, 에어팟을 집에 두고 산책길에 나섰다. 작은 콩나물 두 개로 귀를 막고 길을 걷던 때와는 다른 세상이 보였다. 가로수에 매달린 이파리 몇 개가 노랗게, 빨갛게 물든 모습이 있었다. 참새도 아닌 것이 귀엽고 신기한 소리를 내는 새를 바라보았다. 밤처럼 생긴 열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건 도시에 적응한 밤나무인가? 산밤은 가시로 밤을 보호하는데, 도시에서는 밤을 보호하지 않아도 되어서 이렇게 진화했나?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마로니에 나무의 열매였다.) 나의 관심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경험은 나의 세계를 조금 더 확장시켜주었다. 새소리를 듣고 나무를 보고 열매를 관찰하다 집에 돌아오니 한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짧은 한 순간이 무한하게 펼쳐질 수 있도록, 무언가를 생산하는 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73쪽)본 것이다. "가장 긴 삶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낀 삶"(73쪽)이라 하던데, 에어팟을 두고 산책길을 나서본 용기가 나에게 더욱 즐거운 삶을 선물해줄 것 같아 마음이 좋아졌다.
매일의 산책길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연하다. 내 관심에 주체성을 발휘하는 일은, 곧 변화와 애매모호함, 모순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퍼스널 브랜딩의 맹점은 탁월했다. "친구와 가족, 지인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성장하는 사람을 볼 수 있지만, 군중은 하나의 브랜드처럼 획일적이고 변함없을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만을 본다."(270쪽) 브랜드라는 것은 '내적 일관성'과 '시간을 넘어선 한결같음'을 무기로 사랑받기 마련인데, 개인이 변화와 애매모호함, 모순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니 맥락이 붕괴된 군중에게 허공의 외침을 하기보다는 진짜 "우리가 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288쪽)을 쓰기를 당부한다.
좋은 책은 행동을 이끌어내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나의 관심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습관적으로 관심이 이동하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애매모호하더라도, 모순의 여지가 있더라도 괜찮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주변의 존재와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낀 삶이 될 테니까. 앞으로 살아갈 변화의 소용돌이가 기대되는 일요일 밤이다.
덧붙임. 디지털 세계의 UX를 고민하는 제품 담당자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