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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eok Mar 16. 2022

페미니즘은 패배하지 않았다.

<20대 여자>를 읽고


알게 된 곳
:  시사인 저널 북 첫 번째 시리즈인 '가늘게 길게 애틋하게'를 인상 깊게 읽었고, 천관율 기자의 '20대 남자 현상' 영상도 인상 깊게 보았던 터라, 내가 주인공인 '20대 여자'는 텀블벅 펀딩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랜선 북토크까지 포함된 상품으로 펀딩을 해두고 내내 기다렸다.

구한 방법
 : 텀블벅에서 펀딩 해서 제일 먼저 받아보고 읽었다.

읽은 기간
 : 2022년 2월 14일 ~ 2022년 2월 23일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전에 이 책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책은 배송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읽었고,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쌓여있었지만 결국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리고 나 또한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투표소에 들어갔다. 투표권이 생긴 뒤로 지방 선거 한 번, 총선 한 번, 대선 한 번 딱 한 번씩만 해본 터라 많은 경험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투표소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이렇게나 고민했던 적은 없었다. 그 고민의 과정이 사회를 위해 발전적인 방향이 아니라,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람이라 더 괴로웠다. 왜 나는 이런 선택을 강요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괴롭기까지 했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내 삶에 큰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쨌든 정규직 일자리가 있고, 내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작게나마 만들어온 나의 자산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고용이 이어질지 안 이어질지 모르는 일자리를 가진 친구들은? 아직 사회에 나서지 않은 친구들은? 여성 가족부의 지원을 받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선택을 마음 놓고 할 수는 없었다. 안희정이 있었고, 박원순이 있었다. 그때 내가 가졌던 죄책감과 괴로움이 떠올랐다. 박원순이 사망했을 때 회사에서 매일 같이 헛구역질이 나오던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뉴스룸에 앉아 한숨만 폭폭 내쉬던 김지은 씨를 멍하니 바라보던 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 안희정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박원순이 만든 시민 사회 운동을 동경했던, 과거의 내가 괴롭게만 느껴졌던 그 많은 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마음 놓고 1번에 투표할 수 없었다.


판교의 게임 회사 노동자이자 여성인 류호정 의원이나, 사회의 이야기가 필요한 구석구석을 명확한 언어로 짚어내던 장혜영 의원이 떠올랐다. 대선 토론 때마다 자신의 시간을 써서 작은 곳의 이야기를 대변하던 심상정 후보가 아른거렸다. 결국 나는 1번을 찍고, 정의당에 후원금을 보낸 그 '20대 여자'가 되었다


스물둘에 알게 된 '페미니즘'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인식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몸이나 얼굴을 부정하지 않게 해 주었다. '세상에 믿을 대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신뢰 가능한 것이 여성에게는 페미니즘, '(179쪽)이었다. 그리고 이번 선거 결과로 페미니즘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패배한 것은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세대 간의 인식 차이, 영-호남 지역 간의 갈등일 뿐이다. 오히려 변화한 세대의 정치적 감각이 나타났다고 본다. '20대 여성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참여에 높은 열의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요구가 정치권에 관철된다고 생각하지 않'(111쪽)을 뿐이다. '부유하는 심판자'였던 그들이 잠시 힘을 모았던 것뿐이다. 언제든 흩어질 수도, 언제든 모일 수도 있는 형태로. 그것은 메갈리아 이후로, 아니 그 전의 수많은 여성 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움직임이 언제 어떻게 끝을 맺을지,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회적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안티 페미니즘으로는 대세론을 점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결과가 만족스럽진 않지만, 조금의 희망이 남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없는 유권자 취급당해 억울해서 지난 1월에 쓴 글

그니까 나도 대통령 선거 참여할 수 있는 1인 1표 행사할 수 있는 유권자인데  자꾸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아서 쓰는 글

가만히 있으니까 진짜 없는 줄 아나 봐?  
나라에 세금도 꼬박꼬박 열심히 내고,  뭐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시대, 메타버스 시대, 그런 거에 부합하는 IT 기업에서 열심히 일하고, 회사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 이상으로 잘해보려고 매일 공부하고 노력하고,  열심히 번 돈으로 나라가 빌려준 학자금 대출도 모두 갚고, 헌법이든 사회 규범이든 최대한 벗어나지 않고 상식 선에서 행동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범죄 저지르지 않고, 돈 번 만큼 돈도 쓰고, 그냥 그렇게 열심히 사는 2030 유권자일 뿐인데.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야 했던 일은, 중고등학생 때 학교 주변을 다니면서 성범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몸을 사리면서 돌아다니거나, 실제로 여러 번 성추행범을 마주쳐야 했다. 대학교에 가서는 원래 여자는 코딩을 못한다며 남자 동기나 남자 선배와 연애를 해서 과제를 도움받지 못하면 과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전과를 하거나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신입생 때는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 택시비를 줄 테니 술을 마시러 오라는 요구를 받았고, 술자리에 가서는 남자 선배들 옆자리에 억지로 앉혔고,  엠티에 가서는 여자들이 자고 있는 방에 갇힌 뒤, 같은 과 여자 동기 선후배를 성적 대상화하고 성희롱하는 발언을 들어야만 했고, 학교 곳곳에서 성추행 피해를 입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인도에 여행 갔을 때는 처음 호텔을 벗어나자마자 성추행을 당했고, 산책을 하면서 성희롱은 말할 것도 없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페미니스트가 되면서 지금껏 내가 살면서 겪어온 일들이, 그저 나에게만 일어난 일이라고 개인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여성으로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경험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여성에겐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함께 공부하는, 함께 일하는, 함께 살아가는 다른 성별의 사람에게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페미니즘을 알지 못했다면  그 모든 일들이  나의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했을 텐데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파졌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에게 페미니즘을 많이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내가 들은 말은 "순진한 애들을 물들인다."였고.
 
그냥 나는 살고 싶었을 뿐인데  끝없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내 친구들을 구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순진한 애들을 "물들인다"라고 말한 그 친구는  페미니즘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한 걸까?    
군대도 안 다녀왔으면서  불평불만만 많다고 생각하는 걸까?    
편하게 누릴 건 다 누렸으면서  이제 와서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뭐가 되었든  너의 생각은 틀렸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함께 같은 경험을 공감했기 때문이니까.    
무슨 환경에서 자랐든,  어느 나라에 있든,  여성으로 살면서 겪는 일은  비슷한 모양과 맥락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것이 페미니즘이 사회 운동이고, 인식론이고, 사회학으로서의 학문인 이유다.   
페미니즘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  
페미니즘이 어떻게 학문일 수 있냐고 묻던 사람,  
나는 원래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데 너는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던 사람.    
그들은 2030 유권자로서 자격을 얻었을까?  

그들이 쉽게 가만히 앉아서 얻는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길고 지난한 글을 쓰며 내 자격을 의심해야만 하는 걸까? 열심히 힘들게 살아왔는데도 이 사회에서 인정하는 내 자리는 없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괴롭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살려고 발버둥 친 것 말고는 한 게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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