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에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조금 읽다가 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는 읽던 책을 무릎에 엎어 놓았다. 진한 흙냄새가 났다. 옅은 호흡으로는 느껴지지 않던 냄새였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여름의 식물들, 사람들의 말소리와 움직임, 그런 것들이 가깝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그토록 원했던 어떤 순간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쉽게 그 순간을 지나친다.
여행 중 제대로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챙겨가는 책 한 권, 짬이 날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가방에 넣어온 뜨개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쓸데없을 수도 있는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꽤 중요한 존재가 된다. 좋아하는 것이 있는 인생은 어쩐지 안전하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곁에 두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되기도 하니까. 좋아하는 것들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진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상처받은 날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의문스러운 날에도, 알 수 없이 슬퍼지는 날에도, 좋아하는 것들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저 멀리 갔다가도 결국 그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럴 때면 마음에 집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음에 집이 있다면 그 안에 좋아하는 것들을 채워 넣고 싶다.
올해 여름을 천천히 채워 넣어 본다. 내가 보았던 여름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실의 색상을 고르고 그것들로 내가 상상했던 것들을 만든다. 책을 읽고 마음에 생각을 그린다. 그렇게 그려지는 것들은 단어와 문장으로 완성된다. 어떤 글은 쓰고 어떤 글을 아스라이 그린다.
이번 여름 가장 좋았던 건 저녁노을이 지기 전 하늘이었다. 정말이지 좋았다. 투명한 하늘색과 붉은빛이 감도는 핑크색, 그 사이에 부드럽게 떠있는 구름, 그 어느 계절보다 선명하고 다채로운 초록빛, 돌과 나무를 껴안은 물결과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들. 무릎에 엎어 놓은 책처럼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여름의 순간에 귀를 기울였다. 잊고 있었던 여름날의 소리와 냄새들이 마음에 가득 찼다. 그토록 원했던 낭만적인 여름에 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여름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