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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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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Mar 02. 2024

노래를 듣다가

청춘의 상흔


술 취한 오늘 밤 또 전화를 들지만

힘없는 내 손끝은 버튼을 못 눌러

다 잊겠다고 큰소리치지만

한 손엔 나도 몰래 들려진 니 사진


- 나비효과의 ‘첫사랑’ 가사 일부 -


노래라는 게 참 신기하다. 귀를 기울여 듣다 보면 그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나비효과의 CD를 반복해서 재생하던 그 시절, 나는 바야흐로 20대였다. 자주 들었던 노래는 아주 빠르게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타임머신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며 그런 기분에 취해 있기로 작정했던 나의 20대. 전경(이나영)의 툭 끊어지는 말투와 밉지 않은 이상한 고복수(양동근)가 생각난다. 그들은 열심히 방황했고 몹시도 솔직했다.


우연히 나비효과의 ‘첫사랑’을 듣게 되었다. 유치한 과거가 생각나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나 보다. 나이가 먹어 이런 식으로 떠올리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힘없는 내 손끝은 버튼을 못 눌러’라는 부분을 상상해 보라. 술에 취해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상태에서도 생각나는 얼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고 나를 타이르며 손끝에 힘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나의 눈가는 이미 촉촉해져 있으리라. 이루지 못한 사랑에 저항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청춘에게 이 노래는 분명 대단했다. 손끝에 힘이 없어 버튼은 못 누르지만 큰소리를 치면서 한 손에는 보고 싶은 이의 사진을 들고 있는 아이러니와 콜라보한 초라한 모습이란, 정말이지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추억이 된다는 말처럼, 과거의 흑역사도 지나고 나면 청춘의 상흔처럼 기억의 일부가 된다. 때로는 그 모습이 그립기까지 하다. 무모하고 유치해도 괜찮은 나이에 정말 그렇게 살았다는 건 잘 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대의 나는 잘 살았다.


삼치골목에서 저렴한 안주에 적당히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에도 떠나지 않았던, 그 시절 할당받은 고민과 슬픔. 나는 그것을 나의 일부처럼 지니고 다녔다. 실체 없이 바빴던 그 시절 나는 짧은 앞머리에 샤기컷을 하고, 꽃무늬 치마에 카디건을 두 개나 겹쳐 입고, 시간이 나면 눈에 힘을 주고 이상한 표정으로 열심히 셀카를 찍어댔다. 고민이 많아도, 슬픔이 커져도, 나는 나를 멀리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나를 보았다. 그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불행과 불안을 주머니 어딘가에 넣고 다니며 늘 만지작거렸다. 무엇을 하고 싶으나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 어른들의 충고대로 당장 인생이 망하고야 말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남아 있는 것들 중 쉬워 보이는 무엇을 선택하는 인생을 살기로, 은근히 나 자신과 타협했다. 어릴 적부터 감정이 피로한 탓이었을까.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주머니에 있는 불행과 불안은 조금씩 바깥으로 나왔고, 어느 날엔 그 얼굴을 발견해도 놀라지 않는 나에게 익숙해졌다. 감정이 피곤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도 나아지지 않을 미래가 예상되었고, 감정은 과로한 몸처럼 자주 비틀거렸다. 그 당시 누군가 내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면 속으로는 웃기다고 생각했다. 나와는 다른 상황이면서 쉽게 위로하고 충고하는 게 아니꼬웠다. 무작정 인생에 꽃밭을 그리는 긍정이 무책임해 보이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기본값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이해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 눈을 감고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해당되는 사항에 손을 들 때처럼, 은밀한 기분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부모님의 학력과 재산에 대한 조사를 할 때마다 나는 부당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가진 것을 아무리 애써도 영영 가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란 어디에도 분리수거가 되지 않는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어째서 내가 불공평한 부분에 속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비효과의 노래를 자주 듣던 시절의 나의 마음은 주로 방황했고 반항했다. 좋은 말도 나쁘고 듣고, 나쁜 말도 나쁘게 듣던 시절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시절에 대해 대체로 나쁘게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내가 말하는 이 시절이 몽땅 다 나빴다고 할 수는 없다. 기억을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본 영화로 인해 기억의 진실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다.) 기억은 나의 감정의 변화에 따라 각색된다.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그것은 의심 없이 말해지고 쉽게 달라지기도 한다. 아마 어떤 날 다른 노래를 들으면 그 시절의 즐거움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자주 셀카를 찍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스스로 자주 묻던 시절이 있었다.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묻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주로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는 지금과는 다른 시절의 내 모습이 낯설게 떠오른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때 쓰지 못한 간절함이, 내게 남아 있을까.

노래를 듣다가 남아있는 말들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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