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의 힘
내러티브라는 단어가 있다. 영화, 소설 등 이야기와 관련된 곳에서 등장한다. 영화라면 주인공의 현재 행동의 원인이 되는 장면이 나와야 지금 벌어지는 어이없는 상황을 납득하게 된다. 쉽게 말해 앞뒤가 말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내러티브가 부족한 영화를 보면 “야, 이게 말이 되냐? 납득이 돼?” 하며 되묻게 된다.
우리에게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가 있다. 경험하는 자아는 현재 순간을 산다. 기억하는 자아는 과거를 회상하며 삶의 내러티브를 만든다. 경험하는 자아는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매 순간의 감정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그 감정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이야기를 엮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나’라는 정체성을 구성한다.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에서 이 두 자아를 구분했다. 그는 사람들이 실제 경험보다 기억된 경험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했다. 어떤 일을 다시 하고 싶은가를 묻는다면, 대답하는 주체는 경험한 자아가 아니라 기억하는 자아다. 즉, 우리는 ‘지금의 나’보다 ‘그때의 이야기’를 더 신뢰한다.
예를 들면 휴가 기간 내내 즐거웠더라도 마지막 날 비행기 지연으로 불쾌한 기억을 남겼다면, 그 휴가는 별로였다고 평가한다. 기억은 경험의 평균이 아니라 가장 강렬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카너먼은 이를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라 불렀다. 그는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경험의 총길이나 전체적인 평균보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끝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더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즉, 기억하는 자아는 ‘사건의 전체’가 아니라 ‘가장 인상적인 조각’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왜곡은 행복을 느끼는 방식에도 작용한다. 실제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그 행복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중요하다. 카너먼은 이 점을 “삶의 질은 경험의 총합이 아니라 기억의 서사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설명했다. 현재가 아무리 평온하더라도, 기억 속 내러티브가 불행하다면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믿는다. 반대로 힘든 시기를 겪었더라도 그것을 성장의 이야기로 기억하면, 그 인생은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책 『행복의 비밀』에서 75년에 걸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의 연구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의 행복이 경제적 조건보다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는가에 더 크게 좌우된다고 밝혔다. 같은 사건도 어떤 이는 실패로, 어떤 이는 전환점으로 기억했다. 과거는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며, 그 해석이 곧 개인의 인생 서사가 된다.
나는 여러 연구결과를 읽는 것보다 문학에서 이것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면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자의적으로 창조될 수 있는지 간접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몇 번이나 읽으며 내가 지금 기억이라고 믿는 그 이야기들이 정말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는 매 순간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기억하고, 그 기억에 맞추어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진실은 이야기보다 대체로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진실은 이야기처럼 확실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내러티브가 없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용해 어떤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버는 데 사용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당신이 누군가를 설득하든 어떤 물건을 판매하든 사람들은 내러티브에 반응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도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 형태로 과거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좋은 기억을 만들고 싶다면 마지막에 신경 쓰는 것이 현명하다. 가장 강렬한 순간에 좋은 기억이 남았다면 사소한 실수는 넘어가도 괜찮다는 것도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기억이란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확실한 기억보다는 희미한 기록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