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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의 반딧불이 Sep 16. 2022

"웹소설의 부흥이 순수문학을 망쳤는가?"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YES24.


 책에 관심을 갖다보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문학이 수준이 떨어졌다', '수준 낮은 소설만 판친다.' 등의 말. 일부 웹 커뮤니티의 여론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려운 것이, 언론과 원로 작가들 또한 작가들의 반성을 요구하는 의견을 종종 내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한국 문학의 질적 하락 이야기'는 애독가들 사이에서 잊을 만 하면 나오긴 하지만, 글쎄, 저는 판단을 미루고 싶습니다. 사실, 현대 한국 문학의 질을 규정할 정도로 빠삭하게 아는 건 아닌 데다, 등단도 못한 글쟁이가 그런 얘기를 하면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 밖에 안 되거든요.


 그렇지만, 소설의 질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오늘 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거든요. 다른 것보다도, 어제와 오늘이 딱 맞물리는 게 재미있어 소개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라오콘 군상」.


문학의 역사


 문학. 그 중에서도 산문문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신화(Myth) → 서사시(Epic) → 로망스(Romance) → 근대소설(Novel). 


 집단의 탄생. 집단의 이념과 정신, 혹은 신적 존재와 자연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신화. 신적 능력을 부여받은 영웅들의 축복받은 이야기인 서사시. 영웅담을 다룬 로망스.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근대소설.


 신화와 서사시 부분은 산문문학의 뿌리이고, 소설의 역사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는 없어 언급은 하는데,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수사적이어서 도저히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설의 기원을 로망스에서 찾는 게 가장 보편적인 이론이라고 설명합니다. -송명희, 『현대소설의 이론과 분석』, p.29.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김정균, 「추억의 올드카, 1986 대우 르망」, 『카이즈유』.



소설의 기원, 로망스


 서사시는 대부분 지배계급의 언어, 라틴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고 문화권이 넓어지며 라틴어는 점점 권력자와 교회, 식자층만 쓰는 엘리트들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반면에, 서민들의 입말은 따로 발달해 독자적인 언어가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산문문학이 바로 '로망스Romance'입니다. '링구아 로마나Lingua Romana'로 쓰인 글. '링구아 로마나'란, 중세 방언과 속어가 섞인 서민들의 라틴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망스의 원래 뜻은 '서민의 언어로 쓴 글'이 되겠습니다. 물론, 로망스는 링구아 로마나 말고도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등 여러가지 언어로 쓰여졌으므로, 송명희 교수는 로망스를 '중세에 있어서 속어로 된 이야기' 라고 정리했습니다. 


 어쨌든 소설에 굳이 서민들의 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처럼, 당대 지배층은 로망스를 저속하고 질이 떨어진다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용부터가 서사시와는 다릅니다. 중세 기사들이 성스러운 임무(Quest)를 받아 모험을 하며, 공주님을 구하고 사랑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백일몽적인 만족을 위한 통속소설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음유시인과 이야기꾼의 노래를 찾았지만요. 재밌잖아요.


 그래서 로망스는 국가적인 영웅과 전통을 신성시하고 경건하게 묘사하는 서사시와 달리, '아더 왕 이야기', '알렉산더 이야기' 같은 멋진 영웅들이 벌이는 재밌는 모험담이 주가 됩니다. 국가 전통을 숭상하기보다는 개인의 경험과 창조적인 상상력, 그리고 희극적인 친근감이 더해진 로망스는, 서사시와는 반대로 순수히 재미를 좇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이성규, 「노벨상에 대한 넓고 얕은 지식」, 『사이언스타임즈』.


근대소설, 노벨의 등장


 그리고 시간이 흘러, 16세기. 산문문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신에게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 영웅적인 인물이 아닌 사회의 일개 개인이 중심인 문학. 입말을 그대로 적는 구어체를 쓴 산문문학. 우리 현실에 있을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 시간구조의 변조가 있는 문학. 입체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문학. 자아의식과 체험에 대한 표현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문학.


 전에 없던 새로운(Novella) 문학. 근대소설(Novel)의 탄생을 맞이합니다. 


 봉건주의 붕괴, 중산층 부르주아의 흥성, 경험주의 철학의 등장과 함께, 상업의 발달. 그런 정치경제적 요인으로, 신분과 계급을 넘은 문화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소설은 보다 폭 넓은 독자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쉽게 말해 책에 돈 내줄 사람이 늘었습니다. 


 상업의 발달로 출판사와 서적상이 책을 찍어내 팔 수 있게됨에 따라, 작가들은 특정한 소수의 후원자 대신 익명 다수의 독자들과 경제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전엔 음유시인들과 이야기꾼들에게 돈을 내고 '듣는' 것이었다면, 이 시기부터는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꽤 늘었거든요. 그래서 귀족 후원자들을 위해 글을 쓰던 작가들은, 이제 책값을 낼 수 있는 누구나를 위해 씁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시장 경제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상품'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문문학도 변화합니다. 앞서 언급한 근대소설의 특징은 독자층이 바뀌게 되면서 생긴 변화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본 송명희 교수는 서양소설의 발달과정은 주인공의 사회적 신분이 하락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서사시의 신과 영웅이, 로망스에서는 귀족으로, 다시 소설에서는 평민으로 신분상의 하락이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죠. -송명희, 앞의 책, p.41; 조남현, 『소설신론』, 48면에서 재인용. 


표-송명희, 『현대소설의 이론과 분석』, 푸른사상, 2006, 필자 재현.


 그런데 재밌는 건, 로망스의 위치 변화입니다. M.Boulton의 『산문의 분석The Anatomy of Prose』에서 리얼리즘 소설과 로망스의 차이점을 나열한 표가 그 변화를 잘 설명해줍니다.


 플롯, 인물, 배경, 도덕의식, 문체 등을 나열한 항목 중 마지막 부분은 '성공할 경우'인데, 리얼리즘 소설의 경우 "몇 년 동안 잘 팔리거나 괜찮게 팔린다. 아주 잘하면 로망스만큼 오래 갈 수 있다.". 로망스의 경우는 "몇 백 년 동안 소수의 독자에게 계속 읽히고 있다.".


 문체 또한 리얼리즘 소설은 "분명하게 상식적이거나 개성적"이라고 하는데 반해, 로망스는 "고풍의 문체"로 명확히 구분해줍니다.


 로망스가 수요가 줄어 쇠락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고급 문화의 지위를 얻으며 살아남은 겁니다. 그런데 로망스의 유래를 생각하면 참 재밌는 변화입니다. 서민들의 언어로 쓰고, 백일몽적인 만족을 좇는 이야기라며 천시받았던 로망스가, 근대소설 이후에는 고급 문학이 된 것입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한국경제.


웹소설의 등장


 이런 로망스의 역사는 어쩐지 요즘 말하는 한국 문학의 쇠락 이야기와 겹쳐보이는 부분이 많습니다.


 서민의 글로 쓰인, 백일몽적 만족을 좇는다며 비판받았던 로망스. 가독성 중심의 문장으로 쓰인, 독자의 대리만족을 위할 뿐이라며 비판받는 웹소설.


 소수가 소수를 위해 쓰나, 고급 문학이 되어 오래도록 읽히는 근대시기의 로망스 인식과 현대 한국 문학의 위치. 독자도 작가도 겹치는 근대문학과 웹소설. 


 새로운 것에 밀려 대중적인 위치를 다시 찾지 못했다는 것도 어쩐지 닮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서점부터 달라졌습니다. 한국 문학 서가에 있는 『토지』, 『한강』, 『태백산맥』, 『칼의 노래』, 『사람의 아들』 등의 책들이 출판 1년 내로 100만 부 넘게 팔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받던 때와 비교하면요. 


 지금의 차이라면 순수문학 서가엔 아직까지도 앞서 언급한 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새로 나온 순수문학 소설들은 문학상 수상작품집 같은 걸 제외하곤 자리가 좁았습니다. 서가 이름을 고전으로 바꿔도 될 만큼, 요즘 책보다는 예전에 나왔던 소설들이 많습니다. 애독가들이 그리워하는 그런 시기의 글들이요. 반대로 장르문학 서가는 몇 가지 시리즈를 제외하면 계속 새로 나온 소설로 바뀌는 모습이 보입니다.


 스마트폰 보편화 이후, 글을 어디서나 접하게 되는 시대가 열리며 소설의 이용방식이 확연히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달라진 것입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알라딘.


 실은 웹소설에도 예전엔 애독가들의 사랑을 받는 글이 많았습니다. 『룬의 아이들』 시리즈나, 『눈물을 마시는 새』 시리즈,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과 같이 문장이 좋다고 평가받은 책도 꽤 나왔고, 그 시기의 글은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때도 휴대폰이 보편화되긴 했지만, 데이터 이용료도 비싸고, 휴대폰이 지금처럼 멀티미디어에 최적화된 기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소설은 책으로 읽는 게 더 편했거든요. 


 초기 웹소설은 출판되지 않았더라도 지금과는 다릅니다. 집에서 앉아서 읽는 것이니 책으로 글을 읽나, 컴퓨터로 글을 읽나. 차이가 없었죠. 그래서 그런 건지, 요즘 스낵컬처에 속하는 소설을 웹소설이라고 부르듯, 그 시기엔 스낵컬처 소설을 장르문학. 혹은 대여점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웹소설은 편차가 있긴 하지만 주로 읽는 시간대는 아침과 늦은 밤. 통근 길 지하철과 버스. 혹은 일과 이후 피로가 쌓인 때입니다. 그렇다 보니, 어휘부터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글은 그런 환경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전엔 컴퓨터가 값이 싼 게 아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는 사람만 인터넷에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독자층이 지금과 같이 넓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애독가들의 사랑을 받은 웹소설도 이 시기에 나왔습니다.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웹소설이라기엔 독자층과 이용 환경이 너무 다릅니다. 80~90년대 중후반 출생 밀레니얼 세대와 90년대 중후반~2010년대 출생 Z세대를 한데 묶어 MZ세대로 부르는 게 이상하듯, 이 시기의 소설은 PC통신 소설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문선영, 「람보르기니·페라리가 ‘빅맥 세트’를 배달한다? …“언빌리버블!”」, 『중앙일보』.


 어쨌든 환경에 따라 요구되는 글이 다르기 때문에, 굳이 문장의 질을 이야기하며 순수문학과 웹소설을 비교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카와 오토바이는 출력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용도가 다릅니다. 오토바이로 슈퍼 레이스를 할 수도 없고, 음식 배달에 스포츠카를 쓸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어째서 오토바이가 스포츠카만큼의 출력을 내지 못하느냐고 꾸짖는 것도 좀 이상한 일입니다. 


 독서 환경과 요구부터 달라졌으므로, 요즘 로망스가 다시 대중적인 부흥을 맞이하지 못한 것처럼, 순수문학도 아마 그런 부흥을 다시 맛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시대가 온다면 그건 책으로 읽는 소설이 각광받았다는 뜻이니, 웹소설도 지금과는 조금 달라질 겁니다. 그런 시대라면 경제가 엄청 부흥해 교양의 가치가 올랐거나, 갖고있는 스마트폰도 팔아치워야 할 만큼 경제가 나쁘다는 얘기겠지요.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FreePik.


일반문학은?


 그런데, 웹소설과 상관없는 한국의 일반문학도 문장의 질이 떨어졌다며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제가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게 변화했다면 원인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전자책.


 그리고 오디오북.


 이용 환경이 웹소설과 겹치므로, 역시 가독성이 중요합니다.


 특히 오디오북은 통근길 외에도 업무나 작업 중에도 듣는 만큼, 어휘와 문장구조가 너무 복잡해선 안 됩니다. 


 기존의 책이 오디오북으로 제작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오북 전용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입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경향신문.


순수문학은?


 몰라요.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황정선, 「성공 비즈니스맨 스타일링 팁 10」, 『신동아』.


시대의 변화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이 개발되어야


 아니, 그럼 애독가들이 원하는 그런 책은 이제 나올 일이 없다는 말인가? 사실,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뤼시앵 페브르와 앙리장 마르탱이 지은 『책의 탄생(2010)』에서 17세기 이전의 책 판매 방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작가들과 알고 지내는 귀족 후원자가 책을 요청하면 그때마다 만들어 몇 권 씩 제출하고, 귀족 후원자는 작가에게 책에 대한 찬사와 함께 금액을 보내줬다고 합니다.


 이런 후원-출판 도식은 현대에도 이루어집니다. 크라우드 펀딩 출판이 바로 그것입니다.


 작가들이 기획서와 함께 후원을 요청하면, 그 기획안이 마음에 드는 독자들이 돈을 지불하는 것이죠. 이렇게 출판된 도서는 작가와 독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고 하니, 시도해 봄직한 방법입니다.


 다만, 애독가들이 지갑을 바로 열만한 작가라면 이미 인세만으로도 놀고먹을 정도의 기성작가들인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그런 작가들은 이미 책 내는 대로 팔리니 굳이 크라우드펀딩까지는 필요가 없겠죠.


 그래도 정말로 원한다면 한 번 뭉쳐서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문제를 제시했으면 해법 비스무리한 거라도 내놓아야 하는 이런 글의 특성상 저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미봉책에 불과하긴 합니다. 미안.


 제 머리로는 도저히 안 되니 쇠락해가는 여러 예술과 마찬가지로, 새롭고도 문학인에게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의 개발을 촉구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말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읽어주신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모두 사랑스러워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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