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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의 반딧불이 Oct 01. 2022

"우리는 왜 작은 권력을 선망하는가?"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최형규, 「중국인들이 시진핑 권력을 보며 따라한 이상한 행동!」, 『중앙일보』, 2018-03-27.


 뉴스를 보니 최근 중국에선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고 한다. 환경미화원이나 건물 경비, 아파트 부녀회원, 혹은 버스 안내원까지. 전부 빨간 완장을 차고 다닌다. 그 옛날 홍위병 같은 게 아니다. 중국 국기와 똑같은 색으로 붉은 바탕에 노란 글씨라 인상이 권력적으로 보여 그렇지, 쓰여진 한문을 읽어보면 정말로 해당 직급을 설명해주는 게 전부인, 표식에 불과한 완장이다.  


 권한도 딱 주어진 만큼이다. 그렇지만 다들 자랑스러워 한다. 완장을 드러내보이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그 옛날 홍위병의 기억도 없고, 그저 지금 차고 있는 멋들어진 완장의 감촉을 즐길 뿐이다.


 해당 기사를 쓴 중앙일보 기자도 그런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한 권의 소설을 떠올렸다. 작가 윤흥길이 쓴, 『완장(1982)』.



 이미 제목만 봐도, 동네 건달이 완장을 차고 나서 벌어진 이야기를 담았다는 소개글만 보아도 내용이 대강 예상될 것이다. 작은 권력에 취해 거들먹거리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를 보고 웃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나는 저정도까지는 아니지. 하는 그런 감상을 남기게 되는 그런. 작지만 색이 강해 못 잊을 이야기.


 그래서일까, 별 것도 아닌 허울뿐인 감투 쓴 주제에 거들먹거리고 우쭐대는 인간이 나오면, 지금도 칼럼 등지에서 이 소설이 먼지를 털고 밖으로 나온다.


 심지어 정치인끼리도 '당신 꼭 『완장』 소설에 나오는 종술 같구먼.' 하며 상대를 비난할 때 쓰기도 한다.


 하도 이런 용례가 많아서 그런 건지, 책 4판 작가의 말에 착각하지 말라고 못박아뒀다. 작가 자신이 이 소설로 말하려는 건 보이지 않는 거대권력의 냉엄함이지, 소설에서 종술의 옹졸한 모습만 쏙 빼와서 정치인끼리 서로 빗대며 치고박고 싸우라고 만든 게 아니라고. 너희 욕하려고 만든 소설 보면서 자신은 종술이 아니라는 듯이 굴지 말라고. 네들이 종술보다 더 무섭고 나쁜 놈들이라고.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권총 대신 완장 찬 판문점 北 군인」, 『한국경제』, 2018-10-29.


 그러거나 말거나 『완장』 비유는 지금도 쓰인다. 그도 그럴게, 워낙 찰떡이잖은가. 진짜 감투 하나만 믿고 나대는 그런 옹졸한 인간상을 빗대 풍자하는 데에는, 아직도 이만한 게 없다.


 사실, 이미 작가가 못 박아둔 만큼, 이 소설을 읽었으면 그런 옹졸한 인간 뒤에 숨은 진짜배기 거대권력을 비판해야 옳고, 그냥 완장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활자 낭비로 보이지만, 어차피 감상이란 게 대부분 그런 거 아니겠나. 내가 느낀 감동과 생각을 떠들고 싶어 근질근질하면 그냥 쓰는 거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기획재정부 공식 블로그.


보이지 않는 진짜 권력 


 그런데 실은, 보이지 않는 진짜 권력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런 메시지를 도통 읽어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런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결말 부분에서 부월이 완장에 집착해 망가진 종술을 설득하는 장면 하나 뿐이라. 그 유명한 '완장 차고 다니는 사장이나 교수 본 적 있나? 권력 부스러기나 주워먹는 핫빠리들이나 차는 게 완장이다. 진수성찬은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다.' 하는 일갈이 전부. 


 작가의 말에 적힌 그 보이지 않는 권력을 비판하고 싶었다 하는 건, 읽는 내내 와닿지 않았다. 진짜배기 권력자가 나서고 움직이는 부분은 있지만, 정치인들에게서 보일 법한 그런 권력의 무서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서울 수가 없는게, 그 권력자들이 이 소설에서 무서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괜히 돈 아끼려고 깡패에게 완장 줬다가 뒷수습하느라 애먹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보인다.

 그래서 결국 주제도 '보일 뿐인 완장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읽게 되는데, 소설의 다른 인물도 그런 이야기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종술 이외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진짜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사장이나 경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교직을 은퇴해 이제 종술과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아닌 종술의 은사님조차도, 완장 없이 그의 권위 하나만으로 완장 찬 종술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영화 『말레나(2000)』 中.


 심지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술집 여자 부월도 성숙한 여성의 매력과 몸매를 갖고 있어 부월을 본 남자들마다 혼이 빠지기 때문에, 오만한 태도로 남자들의 구애를 물리쳐도 오히려 거절당한 남자가 굽신거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종술이 괴짜라며 무시했던 인배조차도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채상헌, 「귀농·귀촌 상담소⑼정부·지자체 지원 잘 활용하기」, 『농민신문』, 2015-08-03.


2022년에 본 『완장』과 인배


 인배. 가족따라 서울로 상경했다가 적응 못하고 1년만에 도로 시골로 내려온 총각. 젊은 일손 씨가 마른 농촌에서 마을 잡일 해주다 보니, 어느새 마을 사람 모두가 인배를 찾게 돼서 농사일 하는 총각이 됐다고 한다. 일단 서울 상경 실패해서 내려와 산다는 것부터 패배자라는 인식이라, 마을에서도 괴짜나 하층민 정도로 여긴다.


 그런데 그런 인식과는 별개로 인배 본인은 별 불만이 없다. 마을에서 농사일 도와줄 젊은이가 인배 하나뿐이어서, 그냥 품삯을 마음대로 부르면서 일한다. 일 안 해주면 아쉬운 게 오히려 농사꾼 어르신들이라 달라는 대로 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건 인배의 생활 패턴인데, 인배는 부의 축적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정해둔 월 목표 수익을 정하고, 수익을 달성하면 모두 중단하고 일 안 한다. 이때는 품삯을 몇 배로 불러도 안 한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한기석, 「[만파식적] 탕핑족」, 『서울경제』, 2021-06-10.


 그럼 인배는 그 한 달 치 돈으로 무엇을 하는가? 그냥 논다. 며칠이고 누워 퍼질러 자기도 하고, 발 닿는 대로 여행도 다녀보고, 미친듯이 마시고 취해서 뻗기도 하고……. 그러다가 돈 떨어지면 다시 마을 사람들을 찾아 일을 해준다. 또 돈 모이면 반복. 고용된 처지도 아니라 매어둘 수도 없고, 일손이 인배 하나라 누가 함부로도 못한다. 주민 중 하나는 아예 금지옥엽 기른 딸과 혼인시켜 집에 묶으려고 해봤지만, 인배 본인이 결혼 자체를 원하질 않아 실패.


 농사를 아르바이트로 바꾸면 딱 지금 청년들 사는 방식인데, 이게 82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 청년들이 저런 생활 패턴을 보여 이따금 탕핑족이라는 어휘를 꺼내들지만, 탕핑족의 생활 패턴은 한국의 젊은이들과는 맞지 않는 점이 많아 애매했는데, 이걸 보니 출세를 포기한 한국의 젊은 층을 '인배족(인배族)'*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정말 완벽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 인배族(인배+族): 윤흥길의 소설 『완장(1982)』에 등장하는 인물, '인배'에게서 유래한 용어. 출세와 취직을 포기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며, 얽매임 없는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개척하는 젊은 세대를 지칭.


 작가의 번뜩이는 통찰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시골에 이런 사람이 한 두 명 정도 있던 건지. 어쨌든. 주목받을 만한 인간상인데, 왜 완장 소설을 얘기하면서 이 친구 얘기는 안 하나 싶을 정도로 재밌는 캐릭터였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그리스인 조르바(1964)』 中.


 완장 하나에 묶여 저수지와 마을을 못 떠나는 종술과 반대로, 어느 것에도 묶인 것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자유인 인배. 이런 대비부터가 캐릭터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종술이야 인배를 날품팔이 바보 정도로 알지만, 이렇게 밖에서 보면 오히려 종술이 바보다.


 아니, 종술만 바보 같다.


 어쨌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이 이런 식으로 각자 나름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종술만 빼고. 그리고, 그런 자기 자리를 찾고 소소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겐, 종술의 완장이 먹혀들지를 않는다.


 종술에게 굴복한 사람은 아무 사정도 모르고 저수지에 놀러온 도시청년들 정도가 고작. 그나마도 종술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주먹에 굴복한 것이지, 완장에 복종한 게 아니었다. 사실, 종술이 주먹 솜씨를 보여야 했던 이유도 완장 때문이다. 완장을 내세우자 오히려 무시당해서 주먹으로 설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종술이 찬 완장은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곽근영,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나요?」, 『오마이뉴스』, 2019-07-22.


허무에 대한 작가의 답


 완장에 대한 집착은 실로 허무한데, 그렇다고 완장이 없으면 그냥 손 씻은 불량배에 불과한 처지라, 종술은 이런 집착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집착을 부숴준 게 있다. 바로 사랑이었다.


 완장 때문에 정신 못차리는 종술을 두고, 부월은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따위 되도 않는 완장에 집착하지 말고, 서로를 의지하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자고. 같이 헤쳐나가면 못할 거 뭐 있겠느냐며, 종술을 설득한다. 그렇게 종술은 사랑으로 부월과 함께 '진짜 완장'을 찾아 떠난다. 


 정말 감동적이다. 이것이 작가의 답이다. 답이 없어보이는, 나락뿐인 인생이어도 남녀가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전진하면 충분히 좋은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적이다. 진심으로 이들의 축복을 빌어주고 싶을 만큼, 정말로.

 이들은 나중에 어떻게 살까. 살짝 궁금해지는데, 실은 후속작이 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노라조, 『니팔자야(2015)』 MV 中.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1997)』. 그런데 읽진 않았다. 종술과 부월이 상경해 일하다 종말론 외치는 종교단체에 빠지고, 부월은 한 수 더 떠서 아예 신도들 털어먹는 계획까지 짠다는 줄거리 소개를 읽었는데, 읽고 나니 『완장』에서 받은 감동 싹 깨져서 읽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 결론 내놓고 한다는 게 종교 사기로 남 털어먹기? 보이지 않는 진짜 완장이 돈이었나? 이곡리 완장 사건으로 얻은 교훈은 어따 팔아먹었어!!!!!!!!! 아아아아악!!!!!!


 그래서 이 글 올리고 나면, 『완장』 후속작에 대한 기억은 전부 지워버릴 참이다. 그냥, 종술과 부월이 나도 모를 방법으로 어떻게든 알아서 잘 살았다고 믿고 싶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귀스타브 쿠르베 作, 『안녕하시오, 쿠르베 선생Bonjour, Monsieur Courbet(1854)』.


그럼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러고 보니, 그런 허망한 삶에도 결국 남녀가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전진하면 좋은 삶을 기대할 수 있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러한 가정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은? 

 너무 밑바닥이라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은?


 아무래도, 내가 종술보다 인배를 더 주의깊게 보는 건 그런 까닭인 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속박도 없이, 그저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자유롭게 사는 인배. 그를 향한 사랑도 존중도 없지만, 그래도 큰 파문없이 자신의 소소한 행복을 매일 누리는 인배.


 인배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되뇌며,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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