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신춘문예에 SF 작품이 올랐다는 소식에 한국 SF 독자들의 눈을 끌었는데, 막상 SF팬들은 이게 무슨 SF냐며 황당해했다.
사실 그 해 신춘문예에 오른 SF 소설은 전부 도마 위에 오르긴 했지만, 제일 얘기가 많이 됐던 건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상식의 속도(2016)』. '이게 왜 SF인가?'부터 시작해 '이거 읽을 수는 있는 건가.', '뭐 이런 걸 상을 주느냐'는 등 좀 심한 말이 많았는데, 그런 감상평을 보니 나도 좀 보고 싶어졌다.
심사평에서부터 '문제작'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건 심사위원들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걸 예상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어떤 소설이길래 비판을 각오하고 상을 주었을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사이언스타임즈.
상식의 속도, 줄거리
'아내'와 '딸'이라는 말조차 사전을 찾아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족주의가 해체된 머나먼 미래. SF 영화와 드라마에나 나오던 우주 항해 기술이 현실화된 미래.
그러던 어느 날, 지구는 침략당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아시아엔.
침략자는 외계생명체 젬(Gem). 인류를 공격하는 무시무시한 적.
젬은 딱히 정해진 형체가 없는 진흙 같은 녀석이지만,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다. 인간과 달리 개별 개체의 개성도 없고, 집단 지성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함대와 진형을 이뤄 공격하면, 지구 전투함의 모습과 함대 진형을 똑같이 따라 해 공격하는 창의력 없는 생명체이다.
전쟁으로 고통받긴 했지만, 공통의 적이 생긴 인류는 더욱 단합할 수 있었고, 세계정부 또한 좀 더 전체주의적인 정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어쨌든, 우리 조사대의 임무는 브레이브호를 찾아내 기록을 보는 것이다. 외계생명체 젬이 처음 지구에 왔을 때, 젬은 우주탐사선 브레이브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브레이브호와 젬이 접촉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므로 브레이브호를 조사하면, 젬이 어째서 우리를 공격하게 됐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사대원인 당신은 기록을 천천히 살펴보기로 한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중앙일보.
맛없는 고체 식사와 지루한 일과 등. 고통으로 가득한 우주선 항해의 유일한 낙은 어떤 가상현실이든 실감 나게 구현해주는 헤드기어. 헤드기어의 메모리가 있으니 살펴보자.
우리의 주인공, 기술자 존 바티스타의 기록. 구시대적인 가족주의 문화에 쩌들어 아내와 딸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구식인간이기에 남들이 헤드기어를 차고 온갖 쾌락을 향유할 때도 조용히 화판에 가족의 그림을 그리는 지루한 인간이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딸과 아내의 모습을 보는 찰나. 앗, 갑자기 진흙이 발에! 프로그램 종료! 프로그램 종료! 꺄아아아악!
유감스럽지만 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더 보려면 보다 높은 접근 권한이 필요하다.
우리는 별수 없이 다른 기록을 뒤적인다.
그런데 승무원 얘기는 없고 웬 삼국지 얘기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트위터, @kumacat325.
삼국지의 제갈량은 아이를 너무 늦은 나이에 가졌다. 47세의 나이에. 애를 가지긴 가졌으니 성 기능엔 문제가 없다. 아내 황 씨가 너무 못생겨서 그런 건가? 그럼 첩을 들이면 되는데 왜 안 그랬을까?
유비와 떨어지지 않고 지낸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 제갈량은 동성애자였다! 유비와 만나고 본인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마속과도 관계를 맺었을 것이고, 강유와도 했을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연합뉴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 말라. 당신의 지구 정부가 인구 폭증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를 바꿔서 그런 것이니까. 아이를 낳는 이성애가 죄악시되고, 동성애가 장려되는 사회가 바로 당신이 사는 지구이다. 당연히 방금 본 제갈량 어쩌구도 지구에서 만든 프로파간다이고.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조차, 그냥 만화로 남기지 않고 과거를 비웃는 프로파간다 자료로 사용한다. 가족이 아님에도 유사가족을 이루고야 마는 고길동에 모습에서 가족주의의 우매함을 볼 수 있다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보고 싶다면 인증해야 하니, 우리는 별수 없이 다른 정보를 살핀다.
요절한 인권운동가 아벨 로드리게스의 기록이다.
잘나가는 강연자 아벨. 아벨을 따르는 과묵한 수행원.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유튜브, 빽능 - SBS 옛날 예능
수행원이 다친 아벨을 간호한 것을 계기로 서로 말문도 트였다. 그렇게 정을 쌓았고, 성관계를 포함한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가족처럼 지냈다. 지구의 정책상, 삼 년마다 파트너를 바꿔야 하므로 헤어지고야 말았지만. 헤어진 지 오래됐어도, 그 수행원의 기억은 아직도 아벨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정부가 연인의 몸은 떨어뜨려 놓을 수 있어도, 정신을 떨어뜨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근데 자꾸 씨얄데기 없는 것만 나오고. 아잇, 진짜.
분노한 우리는 그냥 해킹으로 블랙박스를 뚫었다.
우리가 볼 것은 존 바티스타가 헤드기어에서 깨어난 다음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 中.
헤드기어를 벗어 던진 존은, 흙덩어리가 형체를 이루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외계생명체 젬의 침입이었다.
외계생명체가 존의 하반신에서 유전정보를 채취하고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되어, 존을 아빠라 부르며 애정을 갈구한다. 자기 얼굴을 승무원들의 모습으로 연거푸 바꾸면서.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생명체는 존의 유전정보를 더욱 갈구한다. 존의 육체 또한 본능적으로 유전정보를 주려 하나, 존의 이성이 그걸 막는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영화 『터미네이터 2(1991)』 中.
이내 정신을 차린 존은 전동 드라이버로 외계생명체의 복부를 찔렀지만, 불행히도 외계생명체 젬은 피와 살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존이 자신을 찌르는 걸 지켜본 외계생명체는, 존이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드라이버로 존의 복부를 쑤신다. 그러나 존은 젬과 달리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유전정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외계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젖을 존의 입술에 물린다. 그러나 이미 죽은 존은 반응하지 않는다.
결국 외계생명체는 다시금 드라이버를 집고, 우주선을 헤맨다.
브레이브호에 남은 건, 복부가 뚫린 채 죽어있는 선원들과 파편화된 기록뿐이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픽시브, TonyToran.
상식의 속도, 감상
외계생명체 젬(Gem)이 인류를 공격하는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안 나와 있는데, 사실, 추리해낼 근거는 꾸준히 제시됐다.
평범한 일반적인 가족을 이룬 존. 유사가족을 이룬 둘리 일행과 고길동. 성관계도 나누고 정서적 교감도 나누며 가족처럼 지내는 아벨과 수행원의 이야기.
그렇다. 이 소설의 중심 키워드는 바로 '가족'이다.
그리고 존 일행과 조우했으면서도 공격은 않고, 그저 우주선 내 인간의 얼굴과 행동을 모방하는 모습만 보이는 외계생명체. 인간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외계생명체의 행동 방식.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존을 아빠라 부르는 외계생명체.
존이 자신의 복부에 드라이버를 꽂는 걸 경험한 이후, 마주치는 모든 인간에게 존과 똑같은 방식으로 배에 드라이버를 꽂고 다니는 외계인의 행동.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디스이즈게임.
이런 정보를 종합할 때, 외계생명체 젬의 목적은 인간과 종을 초월해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외계생명체와 소통할 수 없어 목적을 모르는 인간이 공격으로 맞대응하고,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을 모르는 외계생명체가 인간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외계생명체 젬은 인간을 보고 가족을 이루려 했으나, 정작 인간의 상식은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결국 상대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공포 속에서 처절하게 싸우다 죽는 것이다.
기술의 속도는 빠르지만, 상식의 속도는 느렸던 인간의 비극이다.
만약 인간의 상식이 좀 이상하게 초월한 상태여서, 외계생명체를 보고 공구 대신 다른 걸 빼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떤 모습이건 전쟁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신문에 오르진 못했겠지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MBC뉴스.
상식의 속도, 왜 비판받았을까?
정리해놓고 보니 좀 분명해지는데, 여러 비판 중 SF가 아니라는 의견은 동의하기 힘들다.
개별 개체의 개성이 없고 개별 지성 없이 집단 지성을 이루는 외계인.
인류와 소통할 방법을 몰라, 인류가 먼저 공격하는 걸 소통의 방식으로 오해한 외계인.
지구 통합 정부가 인구폭증 문제를 막기 위해 동성애를 장려하고, 이성애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모습.
이 소재와 이야기들은 미국의 SF 작가 조 홀드먼이 쓴 『영원한 전쟁(1974)』에서부터 시작해, SF에선 업계 표준. 혹은 장르적 관습이 됐을 정도로 자주 쓰이는 소재들이다. 그러니 『상식의 속도』가 SF 소설이 아니라면, 『영원한 전쟁』을 비롯한 여러 SF소설도 SF가 아니어야 한다.
그런 걸 빼고서라도 장르소설은 장르적 관습을 잘 따르는 소설을 말하는데, 원리가 설명될 수 있는 과학적 이야기, 과학기술에 대한 체험담, 과학기술이 보편화된 사회에서의 인간 등. 나올 수 있는 건 다 나왔으므로 SF 장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소설 자체의 질이 낮다는 비판도 있지만, 아직 소설의 질을 두고 무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말은 못 하겠다.
그런데, SF 소설로써의 질을 논한다는 걸 볼 때, 그 악평들은 결국 신춘문예에 거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생긴 일인 것 같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YES24.
사실, 한국에서 인지도가 있는 SF 소설은 헤일로 시리즈, 노인의 전쟁 시리즈 같은 밀리터리 SF를 제외하면 테드 창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김초엽 작가의 소설 정도인데, 그런 걸 감안하면 아무래도 K-테드 창을 기대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비판 여론에 불을 지핀 건 심사평.
"〈상식의 속도〉는 혜성처럼 뜨겁고 거침없이 '상식 밖의 속도'로 내달리는 문제작이다. 팽팽하게 긴장된 문장과 장르와 시공을 자재하게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 이야기의 근원적인 힘을 생각하게 하는 서사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소설 문학의 땅을 굴착한다."*
심사평부터가 굉장히 두루뭉술한데, 저 심사평은 어지간한 SF 소설에 갖다 붙여도 잘 어울리는 범용성 있는 문구이다. 그런데다 16년 신춘문예엔 SF 장르가 유달리 많이 올랐으니, 신문사들이 붐에 편승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4차 산업혁명 유행한다고 그냥 SF 작품 위주로 뽑은 거 아니냐?' 같은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그래서인지, 조선일보는 2017년 심사평에선 선정 이유를 소상하게 밝혔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파이낸셜뉴스.
왜 이런 방식으로 썼을까?
아니, 그럼 이 소설은 그냥 4차 산업혁명 이슈에 편승했을 뿐인 구닥다리 SF소설인가?
그렇게 폄하하기 전에 잠시. 장르 내에서 익숙한 소재를 서로 다른 색깔로 표현하는 게 장르소설인데, 소재가 낡았다는 이유로 비판하기는 좀 그렇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의 악평 중 많았던 비율을 차지했던 건 가독성. 읽기 영 안 좋았다는 평이었다.
원인은 서술 방식.
여느 스토리텔링 매체가 늘 그렇듯, 재미는 액션과 리액션에서 온다.
인물의 여러 반응과 함께 심리를 엿보게 되면서 몰입도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물이 행동하며, 다른 인물 혹은 세계와 반응하는 소설이 많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인디포스트.
그러나 『상식의 속도』는 다르다. 인물과 사건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대신, 정보의 나열로 이야기를 푸는 방식을 택했다.
남겨진 수기와 편지 등 기록을 훑어나가는 형식의 소설인데, 이런 소설은 그냥 읽으면 가독성이 끝장나게 안 좋다. 몰입할 대상부터가 없다 보니.
이래서 보통 소설처럼 읽어나가면 웬 뜬금없는 사전식 설명문만 가득해 몰입이 잘 안된다. 이 소설이 제공하는 몰입감과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의 몰입감이 비슷할 것이다. 정보만 제공하는 글이니.
이런 형식의 소설은 주어진 정보를 독자 나름으로 정리하고, 이야기를 추리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비로소 재밌어진다. 직접 공부하는 것처럼.
굳이 이런 소설을 쓰면서도 몰입감을 더하고 싶다면, 기록을 탐색하는 주인공을 추가하면 된다. 탐색하는 주인공의 심리와 행동은 소설로 몰입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정보를 최대한 제거했다. 무리는 아니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을 생각하면, 당연히 없애야만 하니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아트스테이션, Ekin Ulas Yildiz.
침묵형 주인공
줄거리 요약에선 편의상 주인공을 기술자 존 바티스타라고 하긴 했지만,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지구에서 파견된 조사대원. 글을 읽는 독자. 바로 당신이다.
이 소설은 독자가 진행하는 이야기이므로, 개성이 주어져선 안 된다. 평범하게 쓰면 주인공의 행동 등의 설명문이 주어지는데, 이러면 캐릭터가 분명해진다. 그렇게 되면 캐릭터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니게 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컴퓨터 접속 기록의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런 문장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캐릭터에 관한 정보가 없어졌으므로, 주인공을 독자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 익숙하지 않은가? 콘텐츠 이용자가 곧 콘텐츠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해 주인공의 생각과 개성을 제거하는 기법.
그렇다. 게임에서 쓰이는 침묵형 주인공(Silent Protagonist)이다. 게임에서 쓰이는 연출을 소설에 그대로 넣은 것이다.
마침 SF이기 때문에 컴퓨터 기록 형태의 소설을 쓰기도 좋다. 컴퓨터이기 때문에 '입력을 기다린다' 같은 말을 넣으면 독자를 참여자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꽤 적절한 선택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GameSkinny.
상식의 속도, 게임에선 어떨까
그런데 게임에서 쓰는 기법인데, 이런 기법을 게임에 쓰면 어떨까? 마침 『상식의 속도』와 유사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쓰는 게임이 있다. 캐나다에서 제작된 게임 『Analogue: A Hate Story(2012)』.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아는 친구가 사교성 없는 '당신'에게 딱 맞는 일이라며 일감을 주었다.
아주 오래전에 출항했으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실종된 세대우주선 무궁화호. 지금 그 무궁화호가 발견됐으니 조사해달라는 역사학회의 의뢰였다.
당신이 할 일은 찾을 수 있는 모든 기록을 받아올 것. 특히 우주선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필요하다면 무궁화호 보안 담당 AI *뮤트를 호출해보라는 말까지 첨언으로 붙었다.
무궁화호에 도착한 당신은 오래도록 방치된 터미널을 켠다.
출처: Let's Play Archive, ProfessorProf.
간단한 인트로를 본 뒤 게임을 시작하면, 텍스트만 있는 명령 프롬프트 화면으로 던져진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이 생짜 텍스트만으로 된 건 아니다.
이것저것 입력하다 AI 조수를 불러오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는데, AI라고 해서 무슨 요즘 유행하는 그런 AI는 아니고, 그냥 소설 속 인물에 가깝다. 스크립트가 정해진 NPC.
조수 호출 이후 캐릭터의 그림이 나오고, 문서를 보는 것도 그래픽 인터페이스 안에서 제공되므로, 마우스로 편하게 정리된 문서를 열람할 수 있다. 몰입을 돕는 음악과 효과음은 덤.
입력부터 그렇지만, 콘텐츠 이용자가 직접 개입할 여지가 많다. 이따금 게이머에게 선택지를 제공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주인공인 자신의 심리를 반영할 수도,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 그래서 파편화된 일기와 자료를 보아도 재밌다.
그런데, 이건 문서 읽기를 통해 진상을 추리하는 점은 같지만, 이미 그림 들어간 순간부터 다르다고 봐야 하지 않나?
만약 이 게임이 『상식의 속도』와 같이 텍스트와 명령 프롬프트로만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망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미 그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은 이미 오래전에 수명이 다해서. 그나마 AI가 진행하고 보정해주는 『AI Dungeon(2019)』이 있긴 하지만, 다른 텍스트 어드벤처도 결국 그림과 음향 효과 등. 여러 장치를 사용하는 게 기본이 됐다. 텍스트 어드벤처도 부족한 컴퓨터 성능 때문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성능 컴퓨터가 보급되면 외면받을 운명이긴 했다.
반대로 『상식의 속도』가 게임으로 나왔다면? 마찬가지로 이 소설도 소설로 나와서 이렇게 알려진 거지, 텍스트 어드벤처로 나왔다면 원산지인 한국에서조차 지금과 같은 인지도를 얻진 못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게임처럼 그림과 음악을 듬뿍 끼얹어 내놓았다면 또 모를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The Metal Archives.
소설을 초월한 소설
레이먼드 페더만의 『초소설 ― 네 가지 제안(Surfiction ― Four Propositions)』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대 소설가들의 지상과제는 소설을 초월한 소설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험적인 소설은 기존 소설과는 형태부터 영 딴판이 될 수 밖에 없다. 보기에 이상한 것도 당연하고. 씹다 뱉은 논문 같다는 악평을 들을 가능성도 높다.
그래도 상업소설에선 할 수 없는 시도를 과감히 해내는 실험 소설은, 오늘도 소설이 가야 할 방향을 계속해서 좁혀주며 성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 소설이 데이터를 얻으려면, 역시 제일 효과적인 건 불특정다수 독자가 보는 것이다.
연구자 정도나 돌려보는 실험 소설이 신문을 읽는 불특정다수에게 읽힌 뒤 여러 데이터를 생산해냈으니, 적어도 실험 소설로는 꽤 고무적인 성과를 낸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독자를 수동적 이해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안 된다니. 이걸 안 작가들은 다음엔 무슨 방법을 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