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모르는 행군, 데스 밸리'
당신, 자기 다리를 먹은거야?
초기 팀을 꾸리고 판매할 프로덕트를 정했다면, 축하한다.
이제 공식적으로 스타트업을 시작한 것이다.
항해를 함께할 동료를 구하고, 첫번째 항해지점을 결정하였으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목표 지점까지 우리 팀을 데려다줄 조그만 해적선과 얼마나 길어질지 모를 항해 도중 먹을 식량이다.
루피는 아주 운이 좋게도, 배를 가지고 있는(정확히 말하자면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우솝’을 동료로 맞이하여 배를 확보했고, 뭐 음식이야 바다에 널리고 널린 있는 물고기들을 손으로 잡거나
주먹으로 때려잡아 요리해먹어 하루하루를 버텨냈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적당한 배와 적당한 식량.
현실에서 스타트업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적당한 사무공간과 적당한 월급이 필요하다.
사무실과 월급이 없는 회사를 들어봤는가. 한마디로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는 것이다.
한 곳에 콕 박혀있는 사무실을 가지지 못한 많은 스타트업들은 집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 집결하거나,
혹은 팀 멤버들의 개인 공간을 전전하며 항해지점을 향해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행군을 시작한다.
흔히 초기 스타트업이 가장 힘든 시기, '데스 밸리'가 시작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스타트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용어가 두가지가 있다.
‘번 레이트(Burn Rate)’, 와 ‘런웨이(Runway)’.
번 레이트는 회사에서 한 달에 얼마가 고정적으로 지출되냐를 나타내는 지표이며,
런웨이는 회사가 가진 돈을 버닝 레이트로 나눈 값, 즉 앞으로 몇 달을 더 버틸 수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이다.
뭐 다 아는 얘기겠지만, 회사가 매달 천 원씩 쓰고, 현재 가진 현금이 만 원이라면,
번 레이트는 천 원, 런웨이는 만 원을 천 원으로 나눈 10(개월)이 된다.
뭐 물론 열정으로 가득찬 스타트업 팀이라면
‘우리는 월급 따위에 휘둘리지 않아, 우리는 무한동력 그 자체니까.!’ 라고 멋진 대사를 외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실제로 몇 달 지나보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칫하면 동료 구하기부터 다시 시작해야할지도.)
만화 ‘원피스’의 수많은 명장면들 중 독자들이 손에 꼽는 장면이 몇 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상디’가 오랜 시간 동안 일해왔던 바다 레스토랑을 떠나며 격한 감사의 표시를 하는 장면이다.
상디는 과거 꼬마 시절, 바다 레스토랑 오너 ‘제프’ 아저씨와 함께 무인도에 표류된 적이 있다.
상디와 제프의 관계는 말 그대로 원수지간이라,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지만, 일단 살고봐야하는 상황.
제프는 상디에게 이렇게 제안을 한다.
‘나는 몸집이 큰 성인이니 이 큰 음식 보따리를 챙겨갈 것이고,
너는 몸집이 작은 꼬마니 이 작은 음식 보따리를 가져가서 먹어라.’
상디는 꼼꼼히 계획을 세워 음식을 아껴먹지만, 결국 음식은 바닥이 나고, 제프의 음식을 강탈하기로 결심한다.
칼을 들고, 제프가 있는 곳에 몰래 잠입한 상디는 엄청난 것을 목격한다.
제프가 처음에 가져간 보따리에는 정작 음식은 없고 금은보화들만 있었던 것.
오랜 기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 연이어 제프의 한쪽 다리가 없는 걸 깨닫고 상디는 말한다.
당신, 자기 다리를 먹은거야?
(뭐 결국은 잘 구출되어, 제프는 '붉은 다리의 제프'라는 이명까지 붙게된다.)
초기 스타트업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서 음식을 아껴먹더라도, 결국 자신의 다리를 먹어야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물론 모든 스타트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렇고 주변을 봐도 이 순간을 대부분 한번은 겪는 것 같다.
이것에 대한 대책? 준비물?
번 레이트를 최소화하고, 런웨이를 미친듯이 늘리는 법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운이 좋아야한다.’
운이 좋으면 다리에 칼 대기 전에, 구조대도 오고, 뭐 헬리콥터도 오고 한다.
다행히도 이 씬에는 초기 스타트업이 필요한 것들을 수급할 수 있도록, 빛과 소금을 선사하는 천사들이 있다.
수련회 교관마냥, 스타트업의 퍼포먼스에 따라 천사가 될수도, 악마가 될수도 있지만 일단.
다음 글에서는 스타트업의 구세주, 초기 투자를 하는 시드 투자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루피의 ‘기어 세컨드 기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