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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Feb 02. 2022

어제와 오늘, 그 하루라는 간격 사이에,

너는 한 살을 더 먹었고, 

구정이라고 다들 본가에 내려갔다. 나도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가족을 만나러 떠났다. 떡국을 먹었다. 할머니가 “일흔 네 살이나 살았다”라며 인생이 지겹다고 했다. 동생은 열여덟이 되었다며 신기하다고 했다. 본인에게 그런 나이가 올 줄 몰랐단다. 엄마는 반 백 살이 되었다고, 아빠는 쉰셋이 되었다며 슬퍼했다. 떡국을 두 그릇 먹으면 두 살을 먹는 거라는 속설에 따라, 동생은 한 그릇 더 달라고 했다. 빨리 성인이 되고 싶다나 뭐라나. 동생은 먹는 음식마다 우리집 강아지 수리에게 몰래 조금씩 주곤 한다. 어제도 떡국에서 떡을 꺼내 수리에게 건넸다. 수리는 떡을 받아먹었다. 꼬리를 흔들고, 고맙다는 표시로 혀를 내밀어 웃어보였다. 그런 후 다시 쇼파 위에 깔린 담요를 이불삼아 자리에 누웠다. 평온해보였다. 하긴, 구정이 밝아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이 저 애에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나이라는 개념은 있을까, 1년이라는 개념은? 그럼 쟤한테 시간이라는 것은 존재나 할까? 아, 그런데 수리가 올해 몇 살이더라. 중학생 때부터 키웠으니까... 9살..? 9살. 9살.. 수리가 벌써 아홉살이다.


새해를 맞이하고 한살을 더 먹는 것의 의미가 뭘까? 쪼개질 수 없는 시간 단위를 우리는 <플랑크 시간>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른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절대 그럴 수가 없다는 것. 불연속적인 세상의 증거. 그것의 값은 10의 –43승으로, 우리가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짧다. 옛날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캐릭터의 움직임을 이미지 하나하나로 조밀히 쪼갠 후 빠르게 재생시켰을 때, 그 캐릭터가 연속적으로 움직이듯 보이는 것처럼, 인지할 수 없는 짧은 단위가 모인 이 시간은, 정확히는 정지된 형태의 연속이지만, 마치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어제에서 오늘로 변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나이를 확 먹은 것도 아니고, 한 해가 갑자기 확 지난 것도 아니고, 시간은 언제나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흘렀고, 우린 항상 연속적으로 늙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기원한다. 한해를 돌아보며, 올해는 작년보다는 더 행복한 해가 되길 기도한다. 희망을 믿는다. 불확실한 미래기에,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기에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설날’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짜일 수도 있고, 나이를 갑자기 한 살 먹는다는 것 또한 허상일 수도 있지만,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따뜻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슬프다. 사람들은 나이를 계산하고, 자기가 늙었다고 말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1년이라는 시간이 갑자기 확 지나버린 것만 같다. 하반기가 되어도, 심지어는 12월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그냥 그대로 삶을 살았고, 내 나이가 몇인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나이가 몇인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이런 머리 아프고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떡국을 먹으며 나이에 관한 만담이 펼쳐지는 오늘 같은 날에는 애써 무시하던 이 많은 잡생각을 맞닥뜨린다. 피해갈 수가 없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우리에겐 ‘나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테다. 그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늙는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그저 작고 뽀얀 모습으로 태어나 주름 기 가득한 얼굴로 삶을 마감한다 정도이지, 해가 바뀔 때 마다 이렇게 몇 살이어서 슬프네, 벌써 몇 살이네, 너무 오래 살았네 등등, 시간의 흐름과 그 결과인 늙음에 대해, 이렇게 오래간 생각하며 이야기 나눌 기회도 없을 거다. 그런 세상에서라면 우린 삶에 있어서 상실감을 아마도 덜 느끼지 않을까.


수리는 분명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아까 떡을 먹은 순간, 분명 아무 슬픔도, 아무 상실감도 느끼지 못했을 거다. 수리는 분명, 행복할 거다. 맛있는걸 먹었고, 편안하게 누웠으니까. 모두의 사랑을 받으니까, 설이라고 간식도 많이 주니까, 분명 최고로 행복할 거다. 하지만 이미 언어의 세계에 지배되어버린, 그래서 시간이 무엇인지, 세월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런 수리가 아프다. 보기만해도 눈물이 난다. 저 애는 내가 겪어본 스물도, 동생이 기대하는 열여덟도, 엄마의 반오십도, 아빠의 쉰셋도, 그리고 할머니의 일흔 넷도, 하나도 겪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나겠지. 곧 떠나겠지, 아홉 살이니까. 곧 곁에서 없어지겠지.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너는 아는지. 모르는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인간이야 뭐 100살까지 사니까, 이렇게 갑자기 시간이 변한 것처럼 착각하는 문화 속에서도 행복을 찾고, 꿈을 꿀 수 있는 거겠지만, 인간의 평균수명이 만약 25세였다면 나는 문득, 내 나이가 올해로 23이라는 수로 변했다는 걸 깨닫는 날엔 너무나 슬플 것 같거든.


강아지는 10살 정도까지밖에 못 산대 수리야. 너는 벌써 아홉 살이네. 왠지는 모르겠는데, ‘여덟 살’, ‘아홉 살’이라 두 단어를 각각 되뇌면 어감이 꽤 많이 다르다. 어제와 오늘, 그 하루라는 간격 사이에, 너는 한 살을 더 먹었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며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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