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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Oct 01. 2021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 또 그로인해 진정으로 자유롭다

그러므로 나는 따뜻하고 아프게 살아가야겠다.

내가 그 누구보다 비극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라는 작품을 책이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한 두 시간 안에 햄릿을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글을 빨리 읽는 아이였고, 그래서 잠들기 전 두 시간은 항상 ‘햄릿 읽는 시간’으로 마음속에 지정해두었다. 하루는 평소와 같이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다가 표지가 ‘쩌적!’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져서 옆에 있었던 엄마가 감탄을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애정했던 작품 중에도 유독 손에 꼽을 만큼 마음에 담아 두었던 장면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오필리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과, 맨 마지막,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서로를 죽이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어두우면서도 철학적인 대사 하나하나에 열광을 하기도 했고, 주인공들이 죽어가는 시점에서는 특히나, 절절한 슬픔과 이유 모를 아름다움을 함께 느꼈다. 나는 그 모순되면서도 강렬한 감정에 푹 빠져버렸고,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작품들에는 그다지 애정을 갖지 못했다.


유독 남들과 비교했을 때 비극적 작품을 더 좋아했던 나는, 그저 내가 자극적인 요소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성을 가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커가면서 내가 모든 비극이라고 다 열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햄릿>을 사랑했고, 그랬기에 뮤지컬로도, 또 영화로도까지 찾아볼 만큼 좋아했지만 비슷한 결의 우리나라 느와르 영화들에는 별 감흥이 없이 잔인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저 주인공이 처참히 망하며 끝나는 것이 내가 바란 작품의 끝은 아니었던 것이다.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왜 똑같은 비극인데도 햄릿은 그렇게 좋아하면서, 신세계나 타짜같은 영화에는 전혀 감흥이 없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딱 한가지였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이 뚱딴지같은 답은 정말 우연한 계기로 찾게 되었다. 우리 선생님께서 언젠가 한 번 오페라 <카르멘>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카르멘”이라 하면, 여자 주인공 카르멘과, 그녀의 애인인 돈 호세가 벌이는 치정극, 또는 막장드라마 정도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돈 호세가 카르멘의 자유로운 성향에 못 이겨 그녀가 ‘이제 다른 분을 사랑하게 되었다’라며 고백하자, 칼을 빼 들고 그녀를 죽여버리는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셨다. 카르멘은 자유를 선망하는 진정한 초인이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고,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모든 속박에 묶인 채로 살아가게 된다. 카르멘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여인이었다면 진정한 사랑을 찾아 돈 호세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우리가 자연적으로 절대 죽지 않는 존재들이었다면, 그러니까, ‘늙어 죽는다’라는 개념이 없이 ‘사고사’만 존재했다면, 이 세상 모든 익스트림 스포츠들은 발명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번지점프, 패러글라이딩, 또는 스쿠버다이빙은, 그러니까 우리에게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별 두려움 없이 즐기고 있는 것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심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였다면, 나부터도 밖에 나가는 시간을 최소화 해 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러한 ‘자유’라는 것을 주는 ‘죽음’은, 오로지 ‘사랑’ 때문에 생긴다.


무성생식을 하는 생명체의 경우, ‘자연사’라는 개념이 없다. 자가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번식을 하려고 해도 혼자 하면 되고, 그러므로 굳이 죽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세계야말로 새로 태어난 이도 ‘나’이고, 어제 태어난 이도 ‘나’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종이 구성되면 절대로 늙어서 죽지는 않지만, 한 가지의 세균에 모든 종족이 몰살당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래서 고등생명체라 불리는 우리들의 DNA가 택한 방법이 두 인간의 피를 섞는 유성생식이고, 그것은 곧 사랑이며, 또 그렇기에 ‘자연사’라는 개념이 등장했다고 한다. 즉, ‘사랑’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사랑이 있기에 자유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 ‘죽음’, ‘자유’ 이 세 가지 단어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과성을 가진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선생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택했던 ‘카르멘’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라고 하셨다. 사랑 때문에 죽고, 죽기 때문에 자유로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막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 연극, 이 오페라가 정말로 이 세계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니.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 또 그로인해 진정으로 자유롭다.> 이 짧은 문장 하나는 내 마음에 적잖은 울림을 주었고,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비극작품들이 생각이 났다.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시작해서 영화 타이타닉과 트로이까지. 이들이 다른 비극들과 달랐던 점은, 주인공의 처절한 멸망과 더불어, 주인공의 아름다운 ‘사랑’이 함께 다뤄졌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세상, 아니, 사랑을 느끼는 대가로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던 이 세계의 진리는, 비극 작품에 투영되어, 어린 시절의 나로 하여금 끝없는 슬픔의 늪에도, 동시에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감정의 소용돌이에도 빠질 수 있게 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느꼈던, 너무나 강렬해서 온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그 감정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나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사랑이라는 행복이 있으면서 동시에, 죽음이라는 슬픔을 견뎌야 하는, 아프지만 따뜻한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사랑도 없고 죽음도 없지만, 그렇기에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없는, 영원하지만 냉정한 세계에서 살고 싶은가?

나는 사랑한다. 가슴 깊이 사랑한다. 사랑의 축복과, 소멸의 자유와, 연기가 되어 사라질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과, 그들을 위해 흘릴 수많은 눈물들을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아프게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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