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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Jul 29. 2021

K에게

- 삶을 계속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나도 잘 모르겠어. 어릴 땐, 뭐, 다른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어리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꿈 때문에 살았던 것 같아. 잘 나가는 음악감독이 되어, 연주자들과 함께 무대를 꾸며가고, 내가 직접 작곡한 뮤지컬을 지휘하는 내 모습을 그리면 심장이 뛰곤 했지.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 믿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인지 세상 모든 것들이 두렵지도, 지겹지도 않았어.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너무나 명확했지. 가슴 뛰는 삶, 사랑하는 음악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삶. 그건 지금 당장 내가 죽는다면 절대로 겪어보지 못 할 무언가이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어야 했어. 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하여튼, 이런 사람들이잖아. 음악을 하겠다고, 그 눈에 보이지도 않은 불꽃에 사로잡혀 주변의 소리에, 시선에 눈과 귀를 닫고 묵묵히 앞에 놓인 나의 길만 걷던 사람. 그랬기에 오래전부터 우울증이 심했던 너도, 토 나올 것 같이 역겨운 기분에 사로잡힌 그 순간에도, 이겨내고, 또다시 일어나서 지금까지 꾸역꾸역 살아있는 거겠지.


- 꿈 때문에만 살아있기에는 세상이 너무 미웠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꿈꿔왔던 것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걸 깨달아서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더 살아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한계가 온 걸까. 너는 점점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것만 같아. 맞아, 모든 게 흐려지고 있어. diminuendo. 삶의 색깔이 변하고 있는 기분이야. 점점 희미해지고, 안개가 되어 사라지고, 이미 처음에 우리가 가졌던 선명함을 잃은지는 오래 된 게 아닐까. 명확한걸 좋아하고, 정의내리는 걸 사랑했던 우리에겐, 세상이 주는 이 탁한 공기가 너무 낯설고 무섭다. 


- 하지만 내게 제일 무서운 건, 너마저 희미해지고 있다는 거야. 음악을 사랑했던 너, 밤공기가 주는 시큰함이 무엇인지 알았던 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슬픈 삶을 살았지만, 그랬기에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던, 그런 네가, 점점 흐려지다가 이제는 내 곁에서 없어질 것만 같아. 

뭐가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 그냥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싶어 하는 너를 붙잡는 게 나은 선택일까, 아니면 자유롭게 이 세상 방방 곳곳을 다니고 싶다고 했던 너의 말처럼, 네가 파아란 하늘을 네 집 삼아 이곳, 저곳, 떠돌아다닐 수 있도록 널 놓아주는 게 더 나은 선택일까.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어 하는 걸까, 아니면 이제는 정말로 지친 걸까. 


-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가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택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희망이 있으니 계속 살아야 한다는 둥,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 라는 둥, 피상적이고 가벼운 위로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나. 나는 정지원이고, 나의 반대말은 원지정인걸. 그냥 그 뿐인걸.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들이, 네가 감당하고 있는 슬픔의 무게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말 들 뿐인 게 구역질이 난다.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건 없어 보여. 영원을 꿈꾸는 동시에 종말을 꿈꾸는 우리들에게, 옳은 선택이란 없는 것 같아. 영원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소멸 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인간의 모습일까.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 속 언젠간 녹이 슬어버릴 존재.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삶을 살아낸다는 건, 우리같이 작고 약한 존재자들이 견뎌내기엔 너무나 슬픈 일 인 것 같아. 


- 하지만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 너에게 해 줄 위로의 말들이 가벼운 것들뿐이라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건 너무 무거워서 그 순간 시간이 멈출 수도 있어. 무거운 것들 주위엔 시간이 느리게 흐르잖아. 너의 슬픔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무거워 질 때엔, 우리 블랙홀을 만들어서 모든 것들을 멈춰버리자. 집어 삼키고, 먹어치워서, 하나가 되자. 사랑이라는 블랙홀을 통과하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그건 아무도 몰라. 어쩌면 다른 세상이 열릴 수도 있고, 어쩌면 그대로 끝일 수도 있지. 그게 다른 세상으로 가는 관문이 되던, 아니면 영원히 사라지는 모든 것의 끝이 되던, 적어도 지금의 우리보다는 명확해 질 거야. 더 이상 탁한 공기와 함께 살지 않아도 돼. 더 이상 회색빛 세상에서 실눈을 뜨며 바람을 맞지 않아도 돼. 


- 고마웠어. 네가 어디에 있든, 행복하길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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