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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May 04.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Nevertheless, love as long as you can.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Liebestraum’이라는 음악을 사랑한다. 처음 이 곡에 빠졌을 때는 고등학생 때, 그토록 원하던 음악전공을 정식으로 허락받아 서울로 레슨을 다니던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레슨은 항상 밤늦게 끝났고, 나는 그 어린 나이에, 고속터미널에서 자정에 출발하는 막차를 타고 우리 집 청주로 돌아왔다. 버스 안에서는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보며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그 때 나와 늘 함께 해 준 음악이 바로 이것이었다. Liebestraum, Love dream, 그러니까, 사랑의 꿈. 이상하게도 나는 ‘사랑의 꿈’이라는 달콤한 제목을 가진 이 음악이 굉장히 슬프면서도 씁쓸하다고 느꼈고, 작곡가가 곡의 부제를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라 붙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왠지 모르게 삼촌이 죽고 나서 변해버린 할머니의 얼굴 같은 것이 생각이 났다.


삼촌이 죽고 나서, 할머니는 삼촌을 사랑했던 만큼 아파했다. 하루에 수면제 두 알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것도 들지 않아 한 알을 더 먹는 날에는 다음날까지 약기운이 돌아 헛소리를 해댔다. 수면제에 취해, 버리려고 내다놓은 택배 종이박스 안에 들어가서 ‘상엽이 없는 세상에서는 여기가 나의 집’이라며 아기가 된 듯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하던 그 모습을,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삼촌은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노래방에 가지 않는다. 삼촌은 연예인 기획사 대표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TV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삼촌은 음악을 잘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면 내 방 문을 닫고 혼자 조용히 집을 나가곤 했다. 너무나도 어린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나는 왜 우리가족은 이렇게 불행한지, 또 왜 우리 할머니만 절대 행복해 질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죽은 삼촌을 원망했고 그의 슬픈 운명을 원망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우리 할머니처럼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나의 오랜 친구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였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우리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돌아가셨다. 우리가 14살이 되던 해에 그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다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미워했던 내 친구는 어떻게든 그의 연락을 피하려 애썼고, 가끔 모르는 번호에, 투박한 말투로 ‘잘 지내는 거지? 언제나 사랑해. 언젠가 꼭 만나자.’ 라는 문자가 오면, 멍하니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게 다였다.

언제나 사랑하고, 언젠가 꼭 만나자는 문자 다음에는, 그의 부고였다. 내 친구는 무너졌다. 그동안 미워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감정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애는 눈이 벌개지도록 울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거라 생각했던 존재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견디기가 힘들다고 했다. 미워하긴 했지만 사랑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고, 차디찬 길바닥에서 쓸쓸히 죽어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겨울이라는 계절이 돌아오면, 말 못할 무력감과 공허함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 애는 그렇게 말했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삼촌의 존재를 밝혔다. 우리 집에도 일찍 돌아가신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며 사실은 이게 다 뭔지 모르겠고,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일 이후에 모두가, 특히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우리들 중에 단 한명도 자신이 불행하길 바랐던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한 일인 것 같다고 하자, 다른 친구들도 하나 둘 씩 본인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친오빠가 일찍 죽었단다. 또 누구는 친한 친구가 일찍 죽었다고 했다. 또 누구는 친엄마가, 또 다른 애는 사촌동생이 어릴 때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다. 우리는 다 같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를 에워싼 공기가 무거워 마치 물속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다. 세상 대부분의 슬픈 일은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아, 앞으로 살아가기가 무섭기도 하면서,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기억마저 떠올랐던 그때 우리의 감정은, 참혹하다고 해야 할지, 비통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답답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말해야 할지, 감히 뭐라고 표현 할 수조차 없었다.


그 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Liebestraum’을 들으며, 작곡가가 적어놓은 ‘Love as long as you can’이라는 부제를 보며, 사랑하기가 너무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삼촌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삼촌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렸다. 내 친구는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 칠 게 뻔했다. 우리가 슬픈 이유는 거의 대부분 우리가 원치 않았던 사건들 때문이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았던 걸까. 또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될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 아빠,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사랑하는 내 동생, 사촌언니, 이모, 우리 집 강아지,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선생님과 사랑하는 내 친구들. 언젠간,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잃을 텐데, 나는 그들을 잃은 슬픔을 도대체 어떻게 견뎌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사랑 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고? 나는 할머니처럼 변하기 싫어. 아프고 싶지 않고, 하루하루를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아.’ 그토록 좋아했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서 삭제했다. 그리고 '누군가와 이별한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라 끊임없이 되뇌었다.


시간은 어쨌든 흘렀고, 작년에, 할머니는 어느새 일흔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할머니의 칠순잔치는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코로나 때문도 있지만, 삼촌이 죽은 뒤로 할머니는 본인이 주인공이 되는 파티 자체를 견디지 못하셨기 때문이 크다.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아들만 없는 자리가 너무 슬프다는 말에, 또 한 번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애써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날 밤, 문득 삼촌이 생각나, 과일을 같이 먹자는 핑계로 할머니 방에 들어가서 같은 이불을 덮으며 오랜만에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70년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삼촌이 죽기 전 날에 바쁘다는 핑계로 아들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대답했다. 얼굴 보면서 같이 마지막으로 밥이라도 먹을걸 그랬다고, 내일 당장 과거로 돌아가 얼굴 한 번만 보면 소원이 없겠다며 씁쓸히 미소 짓는 할머니를 보고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할머니의 소원은 삼촌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일 거야, 라고, 그동안 굳게 믿어왔다. 노래방을 가지 않고, 텔레비전을 틀지 않고,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조용히 집을 나갔던 건, 삼촌에 대한 것들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하지만 할머니는 끝까지 더 사랑하지 못했던걸 후회했다. 잃을 걸 앎에도, 그러므로 그를 더 사랑할수록 본인이 더욱 아플 걸 앎에도 왜 할머니는 삼촌을 잃기 전날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는 걸까.


할머니의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은, 사람을 사귀면 그에게 푹 빠지지는 않으려 애를 썼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심리학 수업에서였나, 연인과의 이별은 상대가 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배운 뒤로, ‘연인’이라는 감성적 관계 안에서 ‘이 관계엔 끝이 존재 한다’는 이성을 찾으려 애썼다. 할머니처럼 변하기 싫어서 사랑을 회피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애인은, 선선한 날씨에 자전거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마치 자유로운 바람과도 같았던,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주는 자유로운 향기에게 서서히 스며들어갔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 순간, 내가 가졌던 이성적인 생각은 무너졌다. 만약 내일 그 애가 내 곁에서 사라진다면, 나는 오늘 그와 하루 종일 함께 할 것이다.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한 번이라도 더 안아 볼 것이다. 그의 눈, 코,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어떻고, 얼굴형은 어떤지, 속눈썹은 얼마나 긴지, 살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목소리는 또 어떤 음색인지를 하루 종일 눈에, 코에, 그리고 귀에 담고 싶다.


그렇구나, 할머니는, 아들의 눈, 코,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어떻고, 얼굴형은 어떤지, 속눈썹은 얼마나 긴지, 살에서는 무슨 냄새가 나는지, 목소리는 또 어떤 음색인지를, 죽기 전 날로 돌아가 하루 종일 온 몸에 담고 싶을 뿐이구나. 아직도 할머니의 옷장 위에는 작디 작은 삼촌의 흑백 사진이 하나가 있다. 할머니는 가끔, 하염없이 그 사진을 바라본다. 얼굴을 어루만지고, 가슴에 품는다. 사진을 보며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하고, 좋았던 추억이 떠올랐는지, 눈물이 맺힌 채 옅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삼촌이 죽은 지 꼬박 17년이 되었는데도, 할머니는 사진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할머니가 삼촌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본인이 죽을 때 까지 그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라는 말은, 그저 연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위대하다며,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자는 의미도 아니었다. 결국 갈기갈기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어 죽도록 아플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면 그와의 관계는 끝이 날지 몰라도,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영원히 살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는 아들을 잊지 않기 위해 17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을 버리지 않는다. 내 친구는 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왼쪽 팔에 아버지의 성함을 새겼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그토록 아픈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이미 죽어버린 이들을 끝까지 더욱 사랑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 할 뿐이다.


사랑의 꿈은, 그래서, ‘영원’일 것이다.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끝나는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영원을 꿈꾼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다. 그건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한참 뒤,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되고 곧았던 허리가 굽어졌을 때가 될 수도 있다. 사랑을 회피했던 나는 이제 할머니를 따라서 내가 아끼는 것들을 사랑 할 수 있는 한 사랑하려고 한다. 그래야, 아니, 그래야만이, 우리의 ‘사랑’은 꿈을 꿀 수 있지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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