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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멘투니스트 Apr 06. 2022

(소설) 꼬뮤니까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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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회장은 몇 달 전 유일한 혈육을 잃은 사람치곤 쾌활했다. 최근 부쩍 심해진 마비증세로 거동이 불편하던 오른손조차 그날 제 위치를 잡고 움직였다. 옆에 후드티 차림의 젊은이가 앉아있었다. 김 회장을 만날 때 늘 야상 차림이던 그가 이날은 검정 후드티에 색 바랜 야구모자를 꼭 눌러쓰고  있었다. 이미 채워졌어야 할 빈자리를 보며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30분이 지나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주인이 손님 2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김 회장과 후드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회의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큰 키에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빈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와 함께 온 사내도 그 옆에 앉았다. 그때까지 김 회장과 후드티는 서있었다. 키 큰 사내가 그들을 올려보며 앉으라 손짓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정권 초기고 모든 상황이 어수선합니다. 각하께서 뵙겠다고는 하셨지만 뭐, 이런 자리까지 정말 오시리라 예상하지 않으셨다는 것 압니다. 아무튼 그 점 양해 구합니다. 각하께서는 예전과 달리 매우 바쁘신 몸이 되습니다. 캬!”

키 큰 사내는 김 회장이 따라주는 술을 단번에 입 속에 들이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시죠. 각하께서 당연히 그러셔야죠. 이렇게 두 분을 보내주신 것만으로도 저희들은 감지덕지입니다.”


“혹시 이번 정부는 저희의 칩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분명 저희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시겠죠?”

김 회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드티가 이날 만남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아! 그거!”

두 번째 잔을 들고 있던 키 큰 사내가 후드티는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조만간 기별을 주실 겁니다.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충이라도 그게 언제쯤일까요? 하긴 설마 각하께서 정권교체에 일등공신인 저희를 잊으시기야 하겠습니까?”

후드티는 눈치 없이 미소까지 지으며 김 회장을 바라보았다.


“탕!”

키 큰 사내가 술잔으로 상을 거세게 내리쳤다.


“뭐!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각하께선 그 프로젝트에 대해 당연히 부정적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난 사태로 그 프로젝트가 얼마나 무모한 헛짓거리라는 것을 온 국민이 다 아는 마당에, 다시 실행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얼마나 정권에 위험한 짓인지 각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효과가 월등이 뛰어나든, 아무런 부작용이 없든, 심지어 모든 국민들이 원한다고 해도 칩 따위를 머릿속에 박는 일은 더는 없을 거라 못 박으셨습니다. 이쯤 말씀드리면 무슨 뜻인 지 아시겠죠? 일등공신 운운하다 잘못하면 국물도 없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키 큰 사내는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후드티를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각하와 저는 각별한 사이입니다. 각하의 의중이 어떤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각하를 위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번 정부가 역대 어떠한 정부보다 성공한 정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 젊은 친구들이 운영하는 회사는 제 혈혈단신 손녀가 만든 회사입니다. 앞으로 칩 따위의 개발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대신 이들이 하고 있는 백신 기술만은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뒤를 좀 봐주십시오. 손녀의 회사가 명맥을 이을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아이의 유지이기도 합니다.”


키 큰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 손녀 따님의 일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각하께서도 그 점은 언급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 칩 관련 사업만 아니시면 어떤 일이라도 최대한 편의를 봐주시겠다고요. 조만간 각하께서 회장님을 직접 부르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김성철 회장이 자신보다 한참 젊은 사람들에게 머리까지 조아려 가며 말했다. 할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들이 돌아가고 후드티와 둘만 남자 김 회장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놀란 후드티가 김 회장에게 말했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단 말이지?”


“네?”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단 말이지? 그나마 나오미는 고통 없이 갔다고?”


“아!”

후드티가 고개를 떨궜다.


“자네도 알다시피 정말 가엾은 아이라네, 내가 그 애 아비, 어미를 강제로 떼어 놨. 키 큰 것 빼곤 아무 야심도 없는 병든 튀기 녀석에게 내 모든 것을 넘길 순 없었. 그땐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후! 내가 언젠간 이야기한 적이 있지? 어느 날 그 자식 손이 병적으로 떨리더라고. 난 떠오르는 게 있었어. 당장 그놈에게 병원 진료를 받아 보라고 했지. 역시 내가 옳았어. 그놈은 불치병에 걸렸던 거야. 딸아이조차 지 남편이 그런 병에 걸린 걸 몰랐네. 난 그놈에게 말했지. 네가 내 딸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으면 이제라도 그만 포기하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얼마간 생각할 시간을 줬지. 근데, 멍청한 자식이 그때까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는 거야! 결국 내가 다그쳤어. 자신 있으면 내 딸과 손녀 데리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든지 아니면 모두 포기하고 혼자 떠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협박했어. 어린 딸과 아내를 진정 사랑한다면 무엇이 그들을 위한 일인지 잘 판단하라고 했어. 그리고 제안도 했어. 내 딸과 나오미를 포기한다면 평생 먹고 살 돈과 치료비 정도는 대주겠다고. 근데, 나를 끝까지 실망시킨 게 뭔지 아나? 그 녀석은 내게 제대로 반항 한번 못하고 자신의 아내와 딸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하더군, 질질 짜면서 말이야. 바보 같은 자식, 약한 것들이 멸종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네. 차라리 내게 반항이라도 했더라면 내가 그놈을 달리 봤을지도 모르지. 병든 주제에 아무런 배짱도 없이 처자식을 어떻게 돌보겠나? 그런 놈은 떠나는 게 모두에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땐 그랬지. 그런데, 이제와 생각하니…… 결국 그를 쫓아낸 것이, 결국…… 그것 때문에 나오미까지 그리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김 회장이 통곡했다.


“어르신……”


“딸애 마음이 그렇게 깊은 지 몰랐네. 한 때 사람들을 풀어 그 자 행방을 수소문한 적도 있. 겨우 찾았을 땐 딸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었고, 병든 아비가 어린 손녀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어, 결국 다 덮었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오미를 생각하면…….”

울먹이는 김 회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누차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이젠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마음에 탈이 날까 걱정이 됩니다. 어르신께선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르신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후드티와 김 회장은 그 뒤로 한참을 더 그곳에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에게 여로 모로 고맙네.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 나오미를 생각해서 그간 연구가 헛되지 않도록 해주게. 비용이고 정부 승인이고 뭐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연구에만 전념해 주게. 우리 나오미 넋이라도 기려야 하지 않겠나?”

김 회장이 세단 뒷좌석 창문을 내리고 후드티에게 말했다. 차 안에서 나오는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눅눅한 밤공기를 식히려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그리고 앞으로 저를 부르실 땐 이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번호를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후드티가 차창 너머로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이전 명함과 마찬가지로 아무 글자 없이 숫자가 양각되어 있고 전과 다른 숫자 조합이 밑에 있었다. 김 회장이 탄 짙은 보라색 세단이 멀어졌다. 시간은 새벽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김 회장을 배웅한 후드티가 몇 발작 옮기기 전에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한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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