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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정체

문명화의 도구인가 전복의 상상인가

막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항상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밖에 나가서 자전거를 타거나, 도서관을 찾아가 잘 꾸며진 편안한 공간에서 발을 쭉 뻗고 함께 책을 봅니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풍선껌'과 '킨더 조이'를 사서 돌아오는 것은 하나의 루틴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린아이라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아빠의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것입니다. 어린이날 선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하루 종일 자기가 보고 싶은 유튜브를 보게 해달라'라고 요구했을 정도니까요.

거실에서 컴퓨터로 유튜브를 보고 있는 아이 옆에서 저도 함께 채널을 시청하게 됩니다. '헤이 지니'와 '허팝'을 지나 요새는 '흔한 남매'에 정착해 있는 듯합니다. 킥킥대고 웃는 소리에 책에서 눈을 떼고 아이를 힐끗 바라보다가, 저 역시 아이와 함께 영상을 보고 있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차라리 영화를 봐, 유튜브만 보고 있지 말고."    

어느 새인가 아내가 다가와 아이가 보고 있는 채널을 바꿉니다. 유튜브에서 넷플릭스로 접속을 바꾸어 아이들이 볼 만한 영화를 틀어 놓습니다. 어떤 영화를 봐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다시 저와 아이의 몫입니다. 아이는 새로운 영화보다 봤던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겨울왕국'이나 '업', '모아나' 같은 애니메이션도 좋아하고, '해리포터' 시리즈나 '미녀와 야수' 같은 실사판 영화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레드 슈즈'입니다. 슈렉의 한국판 버전 같기도 하고, 밀레피센트의 애니메이션 버전 같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레드 슈즈'를 참 좋아합니다.

마법의 레드 슈즈를 신은 주인공은 사라진 국왕인 아버지를 찾는 '뚱뚱하고 못생긴' 공주이지만, 신발을 신고 있을 때는 아름다운 공주입니다. 공주를 돕는 일곱 기사는 원래는 꽃미남들이지만 마법에 걸려 '초록 난쟁이'인 상태로 공주를 돕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초록 난쟁이,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원래 모습인 '꽃미남'이 되는 저주입니다.

레드 슈즈를 만든 왕비는 마녀이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져다 줄 레드 슈즈를 어렵게 만들어 내지만, 정작 그것을 신을 기회는 주인공인 공주에게 뺏겨 버린 '불행한 마녀'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항상 궁금해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이는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단순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만화 영화에 '교훈'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거창한 것이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모든 이야기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까요. 자기 전에 읽어 주었던 '백설공주'나 '인어공주'를 통해 느끼는 점과는 무언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동화의 정체 Fairy Tales and the Art of Subversion>를 통해 저자인 잭 자이프스는 동화의 숨겨진 정체를 얘기합니다.  

동화를 문명화의 기준으로 만들어 낸 '샤를 페로', 구전 민담을 문학으로 정착시켜 부르주아화한 '그림형제' 뿐 아니라, 조지 맥도널드, 오스카 와일드를 거쳐 판타지와 월트 디즈니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꽤 깊숙하게 파고듭니다.

동화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문명화 과정에서 어떻게 발전되고 변화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 책은 얘기해 줍니다. 어느 문화에서든지 가장 좋은 것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민속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설화와 문학이 오늘날까지 발전하고 활용되어온 과정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화의 황제인 안데르센을 볼까요?

'인어공주'를 썼던 안데르센은 덴마크의 부르주아 엘리트들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쓰던 사람입니다. 안데르센은 당대의 폐쇄된 계급 엘리트 층에 속하기를 원했습니다. 안데르센은 서구의 귀족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에게 인정을 받았고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완전한 소속감을 느꼈던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안데르센은 외부인이고 독거인이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고, 평생을 방랑하며 살았습니다. 지배 계급을 사랑하면서도 지배당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데르센은 가난한 구두수선공 아버지와 세탁부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프롤레타리아 집안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기회주의와 순응주의를 통해 명성을 얻었지만, 그 명성을 또 불편해하고 저주했습니다. 안데르센은 평생 동안 신경질환과 정신장애에 시달렸습니다. 안데르센은 자신을 알라딘과 동일시했으며, 자신의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알라딘 이야기를 라이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데르센은 항상 '어른들'을 대상으로 동화를 썼으며, 1850년 이후에는 어린 독자들을 아예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독자를 배제한 동화작가, 엘리트층을 동경하며 동시에 혐오한 사람. 그가 바로 안데르센이었고, 이런 모순 감정은 그의 동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납니다. 이런 모순 감정이 안데르센의 동화에 역동적 긴장을 부여하는 힘입니다. 사회 순응을 바라면서도 또한 그것을 거부하는 모순 감정.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에서 헤게모니 집단이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법은 규범과 관습, 규칙, 예의범절, 문화코드 등을 주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엘리아스의 주장에 따르면 민족이 사회 또는 국가로서 존재하려면 4가지 기본 기능을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는 '경제' 기능, 둘째 계급과 사회의 폭력을 통제하는 '갈등 조정' 기능, 셋째 공포를 극복하고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 기능, 넷째 개인이 사회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문명화' 과정의 기능입니다. 마지막 문명화 과정의 기능은 통과 의례와 또래 압력, 집단 압력, 사회적 규약과 법률 등에 의존하게 된다고 썼습니다. 동화는 바로 여기서 기능합니다.

머릿속에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떠올려 보시겠어요?

여자가 주인공인 동화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결혼'인 반면(이야기의 마지막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거든요)에, 남자가 주인공인 동화는 사회적인 성공과 업적이 아내를 얻는 것보다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여성에게는 남자가 삶의 목적이 되는 반면에, 남성에게는 여자가 부수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능동적이고, 분별력을 발휘해 원하는 바를 성취하며, 고도의 문명화 수준을 자랑합니다. 여자 주인공은 아름답고, 충실하고, 집안일에 헌신하고, 겸손하고, 유순하며 약간 미련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구원할 '왕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지 조금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하긴 뭐 그렇게 따지자면, 드라마도 영화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아직은 아이가 잠자리에 들 때 읽을 책을 함께 골라주어야 할 아빠로서 아이의 책을 고르는 데 더 신중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이 날에 올리는 서평 치고는 참 안 어울리죠?

#동화의정체 #TheFairytalesandtheArtofSubversion #잭자이프스 #문명화의도구인가전복의상상인가 #노베르트엘리아스 #문명화과정 #어린이날에이런서평이라니 #밑줄긋는남자 #Thisis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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