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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Oct 03. 2022

고슴도치의 거리

은래빛 에세이


어릴 적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고슴도치들이 외로워 서로 몸을 바짝 붙이면, 가시에 찔려 아프게 된다.

아픔에 서로 거리를 두면 외로움과 추위에 떨게 된다. 고슴도치들은 외로움과 아픔을 반복하면서, 그들만의 적당한 거리를 찾게 된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것인데,  인간관계를 통한 '친밀감에 대한 욕구'와 자율적이면서 '상처받지 않는 상태에 대한 욕구'는 동시에 양립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때는 아주 어렸을 때 같은데,

마흔이 된 지금이나 그때나 내가 겪는 '고슴도치 딜레마'는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 때 '진혜'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성적이 상위권이었고, 혜는 하위권이었기 때문에 평소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지만,

우연히 짝꿍이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져 소위 '베프'가 되었다.


당시에는 성적이 상위권이 아이들끼리만 친하게 지내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들은 굉장히 예민하거나, 서로 경계하거나, 질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열심히 공부하고도 하지 않은 척하거나,

을 염탐하는 행동들을 했는데

그것들은 몹시 나를 피곤하게 했다.


그러던 중 새롭게 짝꿍이 된 진혜는 솔직하고 재미있는 아이였다.

그녀는 내게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해 주었고, 난 그녀에게 지구과학과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정말 똑똑하다며 어떻게 그렇게 영어 독해를 빨리하느냐고 감탄하곤 했다.


난 그녀와 같이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도 같이 가고, 교환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해 겨울 우리는 대입 수능시험을 보았고, 난 4년제 대학교에 입학하고 그녀는 2년제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종종 그녀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대화의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괜찮은 남자를 만나는지, 남자에게서 어떻게 고가의 선물을 받아내는지, 또는 주변의 삼각관계에 대해 험담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오랜 기간 동안 취업공부를 하였는데, 공부를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나에게 전화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카톡으로 상담을 요청하며 하소연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달래며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붇돋워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고,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녀의 하소연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합격을 하고 나서도 그녀의 하소연은 계속되었다.

장기간 취업공부를 하느라 너무 지치고 마음이 우울해서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이제 1등 신붓감이라고 자랑하다가, 다시 우울해하며 위로를 구하곤 했다.



어느 날은 그녀가 처음으로 일하게 된 근무지에서 '본가가 서울이고 부자인 젊은 남직원'이 본인에게 호감을 보인다며 자랑을 했다.


"그래? 잘됐네~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한번 만나보는 건 어때?"

"안돼, 안돼~ 그 남자는 날 좋아하면 안 돼!!"

"..?? 왜?"

"그 애는 나에게 서울에 잘 사는 남자들을 여러 명 소개해 줄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해! 걔는 안돼!"


나는 그녀와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기분이 다운되거나 실망하는 날이 점점 늘어가면서

그녀와 서서히 연락을 끊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회사에 다니는 워킹맘이 되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산지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들과 모두 연락이 끊겼다.


진혜처럼 가치관이 달라 실망하면서 점점 연락이 끊긴 경우도 있었고, 그냥 육아를 하며 바쁘게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원해진 경우도 있었고,

내 아이가 아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연락을 하지 않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의 친구는 한 명도 남지 않았고,

현재 내게 남아있는 친구는 가까운 회사 동료 3명이었다.


하지만 그들마저도 자주 연락을 하는 경우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전화 또는 카톡, 회사 메신저로 본인의 힘듦과 불만, 고통을 토로했다.

회사 업무의 어려움.. 사이코 상사.. 남편과의 갈등.. 육아의 고통.. 시어머니와의 갈등..

본인의 스트레스를 나에게 말하는 것으로 푸는 듯했다.


그러면 나는 매정하게 잘라내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공감하고,

마음 아파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주려 노력했고


그러고 나면 매우 에너지가 소진되어 피곤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휴일에 집에서 쉴 때도 그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친구가 자신의 불만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려 할 때

바쁘니 대화를 나중으로 미루자고 하거나, 전화를 받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몇 남지 않은 친구들에게조차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그들에게 고민을 잘 들어주는, 도움이 되는 '좋은 친구'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들마저 멀어지면 정말 친구가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이 나에게 '친구'인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나?

가까운 지인으로부터의 인정 욕구, 소속감,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라는 자부심?


결국 나는 여전히 '고슴도치의 거리'를 찾지 못한 채 아픔과 외로움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내가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 속의 고슴도치들은, 아픔과 외로움을 반복하다가 '적당한 거리'를 찾게 되었을까?


아니면 그들도 나처럼 여전히 반복하고 있을까?




< 고슴도치의 거리 끝 >


이미지 출처 - https://m.blog.naver.com/brkim0929/222220144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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