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 ≪Portrait of a Collection≫ 전시
송은에서 열리는 피노 컬렉션 전시 ≪Portrait of a Collection: Selected Works from the Pinault Collection≫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11월 23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피노 컬렉션에서 엄선한 작품 60여 점을 전시한다.
전시 제목은 "Portrait of a Collection" 즉, "컬렉션의 초상"이다.
잘 그린 초상화는 모델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다. 실물을 복제하듯 똑같이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화가가 모델을 어떤 사람으로 보여주려 하는지, 모델은 자신이 어떤 인물로 각인되길 바라는지 그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초상화가 폭로하고 감추며 부각하고 축소하는 대상의 특징들이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한 힌트를 던진다.
이처럼 이번 송은 전시는 피노 컬렉션이 한국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컬렉션의 얼굴이다. 얼굴이 사람의 기질과 성향 등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신체의 일부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듯, 피노 컬렉션의 일부이자 대표자로써 이번 전시는 피노 컬렉션의 수집 철학을 전달한다. 피노 컬렉션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과 후원하는 작가, 전시 구성과 방식을 통해 컬렉션의 가치관과 예술관을 들여다보자.
전시 구성은 2층의 구상화/인물화에서 3층의 추상화/풍경화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는 전통적인 장르별 공간 구획의 식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쉽게 정의하는 구상과 추상의 분할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유형의 인물화와 풍경화를 내놓는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영역은 확장된다.
미리암 칸 & 피터 도이그
2층은 미리암 칸과 피터 도이그의 인물화로 시작된다. 가로 30센티의 종이 작품부터 높이 3미터의 캔버스 유화 대작까지, 미리암 칸이 거듭 실험해 온 다양한 크기와 매체의 인물 초상을 볼 수 있다. 눈코입이 뚫린 마스크처럼 그려진 사람 얼굴, 눈두덩이가 해골처럼 푹 파여 있는 모습은 미리암 칸의 시그니처다. 뭉크의 <절규>(1893)를 닮은 <sarajevo, 22.08.1995>(1995)는 사라예보의 비극적 역사와 더불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세계 곳곳에서의 전쟁, 학살, 난민 위기 등의 참상을 마주하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분노와 슬픔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미리암 칸의 인물들과 마주 보고 있는 피터 도이그의 <Bather (Night Wave)>(2019)에선 표정을 읽어낼 수 없는 한 인물이 조용한 낙원, 또는 너무 고요해서 으스스한 공포영화 속 마을 같은 배경 앞에 서 있다. 작가가 2002년부터 지금까지 거주해 온 트리니다드에서의 백인으로서 경험한 일상을 담아낸다.
마를렌 뒤마 & 뤽 튀망
오싹한 분위기를 이어, 다음 공간에서는 마를렌 뒤마와 뤽 튀망의 무채색 톤의 회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칭을 이루도록 설치된 3미터 세로형 캔버스 두 점에 각각 임신한 여성과 나체의 남성이 그려져 있다. 마를렌 뒤마의 뮤즈인 딸이 임신한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진 <Birth>(2018)와 기억과 상상,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파편적 인상들을 바탕으로 그린 <Alien>(2017)이다. 물감이 여전히 흐르는 듯 투명하게 채색된 인간의 신체는 익숙하지만 생소하게 와닿는다.
드라마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뤽 튀망의 작품으로, 그는 극적인 순간이나 충격적인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드러나는 찰나의 표정을 포착한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느끼는 근원적 공포감에 함께 휩싸이게 된다.
루카스 아루다 & 아니카 이
3층에서는 루카스 아루다와 아니카 이의 작업이 대구를 이룬다. 작은 캔버스에 세밀한 붓으로 찍어낸 아루다의 풍경에서는 어슴푸레한 색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들인 시간이 엿보인다. 특정 지역을 재현한 풍경이 아닌 작가의 정신상태와 감정이 담긴 이 풍경화들은 관람자 개개인의 기억과 경험에서 기인한 사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아니카 이의 대형 회화는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이용해 그려진 이미지들을 겹겹이 쌓아 완성했다. 아니카 이의 풍경화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거대한 우주 또는 현미경으로 본 세포의 세계처럼 독특한 공간감을 자아낸다.
관람객은 두 작가의 상반된 풍경 - 완성된 화면, 사용된 기법 등 모든 면에서 - 을 번갈아 관찰하면서 풍경화의 확장을 목격한다.
줄리 머레투 & 루돌프 스팅겔
점점 더 추상화되는 작업들은 이 공간에서 더 이상 구상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추상화로 정점을 이룬다. 줄리 머레투의 선들은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다. 작업의 시작이 뉴스나 신문에 실린 보도 사진이라는 점이 무색하게 우리가 마주하는 캔버스는 '사실'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잉크와 붓질, 스프레이, 디지털 리터칭의 결과물만 남아 있다.
디지털 사진 같은 루돌프 스팅겔의 회화는 추상의 법칙을 깬다. 산을 묘사한 풍경화 같기도 하고, 천이 접혀 만들어낸 임의적인 무늬 같기도 한 "Untitled"(2009)는 '극사실주의적 묘사가 추상적일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 옆에 또 다른 "Untitled"(2022)는 작업실 벽에 걸린 자신의 추상화를 촬영한 이미지를 다시 캔버스에 유화로 재현한 메타인지적 작업으로, 사진과 회화의 경계, 작가의 위치와 역할 등을 성찰하게 한다.
1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피노 컬렉션은 이번 전시에서 여러 작가를 소개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한 작가의 작품을 세 점 이상 씩 전시했다. 그로써 관람객은 일련의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관심사를 발견해 그들의 작품 세계를 한 뼘 더 깊고 넓게 살필 수 있다.
2층부터 3층까지 줄곧 하나의 방에 두 명의 작가를 소개하는 구성은 2인전 전시 시리즈 같다. 두 작가의 작업을 함께 감상하며 주제와 관점, 표현 방식과 언어가 공유되고 교차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사하거나 상이하기 때문에 호응하는 두 작가의 작업을 한 공간에 마주 보게 배치해 '공간적' 감상을 이끌어내고, 그로써 개인전보다 더 역동적이고 단체전보다 덜 산발적인 전시가 완성된다.
이번 피노 컬렉션 전시에서는, 작가 한 명의 작업세계 속에서 맥락을 이해하고, 둘 이상의 세계들 사이에서 또 다른 맥락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구성된 전체 전시는 컬렉션의 정신(spirit)을 충분히 반영한 듯하다.
*원문은 아트인사이트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