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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구영 Mar 13. 2023

소울푸드

201102

내 소울 푸드는 오뚜기 쇠고기 죽이다. 그러니까 인스턴트 죽이다. 처음 끓일 땐 쌀알이 꼭 플라스틱처럼 부서지는 죽인데 4인분이나 되면서 지퍼팩으로 포장되어 있지도 않다.


나는 외로움을 잘 모른다. 처음 상경했을 때, 엄마는 내게 외롭지 않느냐고 걱정스레 물었고 그 무드에 맞춰주지 못한 나는 별루?! 하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자취가 처음도 아니었고, 사랑하는 우리 고양이 도담이도 있고. 생각해 보면 스무 살에 처음 자취방에서 잠들던 날도 그냥 입학식이 걱정됐지 가족들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면 서러운 마음이 들긴 한다. 이게 외로운 건가? 싶기도 하고. 서러워봐야 별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넘기지만. 그때 생각나는 게 아빠가 끓여주던 인스턴트 죽이다.


아빠는 꽤 다정한 사람이다. 리틀 구영쓰를 씻기는 아빠. 신혼 초 아내가 해주는 밥이 맛없었지만 요리책을 뒤져가며 식사를 차리는 모습이 귀여워 봐줬다는 사람. 우리 집 국수 전문가(요즘은 잡채 전문가). 나는 엄마한테 말하기 무서운 일이 생기면 아빠한테 먼저 말하고 아빠 뒤로 숨었다. 아빠는 수학 익힘책 숙제를 베껴갔다가 벌로 필사 숙제를 받아온 딸 대신 열 장이나 되는 소설을 세 번 필사한 사람이다. 그것도 내가 내 글씨체로 베껴 쓰기 쉽도록 연하게 적고 내 글씨처럼 흐리멍텅하게 적어주었다. 물론 선생님은 그게 내 글씨가 아님을 알아보셨겠지만.


내가 아프면 아빠는 마트에서 인스턴트 죽을 사다가 끓였다. 4인분이나 되는데 꼭 한 번에 다 끓였다. 손이 커서 그렇다. 국수도 셋이서 먹는데 꼭 8인분을 다 끓인다. 냄비 가득 끓인 죽은 나 혼자 먹는데 항상 그만큼이나 끓여서 삼 일동안 죽만 먹었다. 그런데 그 죽은 퉁퉁 불고 차갑고 떡이 질수록 맛있다. 아빠는 민망해하며 이제 그건 버리고 밥을 먹으라는데 진짜로 맛있어서 다 먹을 때까지 죽만 먹었다. 내가 더 크고, 대천이 조금 더 도시가 되고서는 죽 전문점에서 전복죽을 사왔다. 나는 괜히 그거 말고 있잖아, 했다.

어른이 되어서 이제 내가 나를 버텨야 하는 지금은 가끔 그 죽이 생각나버린다. 아프지 않아도 괜히 쫌 울고 싶다. 부엌에서 냄비를 뒤적이는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됐고 아빠는 어르신에 가까워진다. 조금만 아파도 다 때려치우고 집에 내려오라는 아저씨가 늙어버릴까봐 겁이 난다. 겁이 나도 별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견뎌야지.


가끔은 인생에 일시 정지가 걸려있는 것 같다. 아무도 안 늙을 것 같고 아무도 안 죽을 것 같고 아무 것도 안 변해서 이대로 아무 미련도 두려움도 없어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치만 그런 건 없고 죽음은 꼭 슬픔을 남기니까, 만약 내가 악역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keep calm and carry on 같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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