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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구영 Mar 13. 2023

봄이면 딸기를 사놓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220630

병원에서부터 가볍고 비관적이지 않은 글을 하나 써 보려고 고민했는데 영 생각이 나질 않는다……. 메모장이나 뒤져볼까 했는데 이미 쓸만한 것은 다 써먹어서 며칠간 아무것도 못 했다. (더불어 자괴감을 느꼈다. 싸우다가 ‘어? 방금 그 말 좋은 것 같아 잠깐 좀 적을게’하는 래퍼 남친마냥 있는 소재 없는 소재 박박 싹싹 덕덕 긁어다가 시 쓴 게 넘, 구려!) 쩝…….

낮잠 자고 싶을 때 떠올리는 기억을 적어보고자 한다.


엄마는 한 병원에서 20년도 넘게 일했다. 내 최초의 기억은 4살 때, 무려 동생이 만들어지기도 전인데 그때도 엄마는 그 병원에서 일했다. 병원이 으레 그렇듯, 엄마는 가끔 3교대를 했고 연차 사용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하교하고 집에 갔는데 갑자기 집에 엄마가 있는 일은 드물었다.


그날은 아마 중1 늦봄이었다. 채 하복을 입기도 전이어서 긴 셔츠를 걷어붙였던 기억이 난다. 등굣길마다 아빠 차를 탔던 탓인지 나는 버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지금도 별로다) 40분 정도를 걸어 집에 갔다. 논뿐이던 곳에 새로 도로를 내 언덕을 빙 둘러 가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다만 동물들은 아직 그 길을 익히지 못했는지 종종 그 이차선 도로 위를 건넜다. 고양이를 자주 봤고 종종 뱀을 봤다. 초등학생들이 뱀을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보고 있기도 했다.

집 문을 열었는데 동생이 있었다. 맨날 놀러 나가는 놈이 웬일로? 하고 보니 엄마가 부엌에서 딸기를 씻어 나오고 있었다.


일찍 왔네?

반차 썼어.

왜?

그냥~


그냥이구나. 반차가 뭔지도 잘 모르던 나는 교복도 채 갈아입지 않고 거실 바닥에 앉아 딸기를 조금 먹다가 가물가물해져 모로 누웠다. 해가 지고 있었다. 집 안이 노랗게 번졌다. 동생이 틀어둔 투니버스에선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나고,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한테만 애교 잔뜩인 동생이 앞뒤가 엉망인 얘길 하고 있었다. 걔는 지금이나 그때나 ‘화가 난다’고 한다. 그냥 ‘화난다’고 하래도 영 입에 붙지 않는 모양이다. 엄마도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 대꾸 없이 딸기만 먹었다. ‘그랬구나’ 같은 동조도 해 주질 않았다. 엄마는 쪼금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까 과일을 씻어 아직 차가운 손이 내 앞머리를 빗어 넘겨줬다. 쓰다듬어지면서, 우와, 좋다, 고 생각하면서 잠들었다. 딸기 냄새가 진동하는 낮잠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낮잠이 자고 싶어지면 그 기억을 뒤져 떠올린다.

봄에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찾아가면 싱크대엔 아직 뜯지 않은 딸기 박스가 놓여 있다. 혼자 사는 나는 딸기를 사도 플라스틱 팩째로 씻어 옮기지도 않고 먹는데 내게 딸기를 먹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괜찮은 접시를 꺼내 그 위에 내준다. 그러면 노란빛이 드는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요즘 내게 감정은 ‘흠 좋당’과 ‘개싫다차라리할복함’뿐이라서 그게 무슨 기분인지 잘 모르겠다. 너무 뭉텅뭉텅 살았나 하는 고민이 든다. 그러면 안 되는데.

건강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도록 따뜻한 다정의 방법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배울 수 있을까?

아직 배우고 싶은 게 있다는 점에서, 다시 잘살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내년 봄에도 내게 딸기를 먹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좋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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